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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올림픽 벽 뚫은 ‘변두리’표 봅슬레이

대기업 넘어선 일본 중소기업 성공 스토리…‘쿨러닝’ 자메이카팀과 평창行

  •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올림픽 벽 뚫은 ‘변두리’표 봅슬레이

올림픽 벽 뚫은 ‘변두리’표 봅슬레이

일본 오타구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팀이 제작한 썰매로 연습하고 있는 자메이카 봅슬레이 대표팀. [사진 제공·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

5월 29일 일본 도쿄의 인공섬 오다이바(お台場). ‘원 러브 자메이카 페스티벌’ 행사장에 들어서자 레게 음악이 귀를 파고들었다. 행사장 중앙에 자리한 자메이카대사관 부스 앞에서는 초록색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옆에 놓인 검은색 봅슬레이 썰매 한 대가 유독 이목을 끌었다. ‘시타마치(下町·변두리) 봅슬레이’라는 로고가 붙은 썰매 옆에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자메이카 선수들의 사진이 들어간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행사장을 찾은 이들은 썰매를 타고 아이패드에 비치는 실감 나는 봅슬레이 활주 영상을 시청하며 핸들을 움직였다. “정말 멋지다.” 젊은 여성 두 명은 팔을 활짝 벌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지켜보던 호소가이 준이치(細貝淳一) 매터리얼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2011년부터 도쿄 오타(大田)구의 중소기업들이 시작한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기술력 하나로 의기투합

봅슬레이는 카본 등 첨단소재로 만든 썰매를 타고 속도를 겨루는 경기다. 최고시속이 150km에 달해 ‘빙판의 F1(포뮬러원)’이라 부른다. 페라리, 맥라렌, BMW 등 슈퍼카 제작회사들이 주로 썰매를 만드는데, 대당 가격이 1억~2억 원에 달한다. 이런 봅슬레이 썰매를 일본 마치코바(町工場·동네 공장)가 만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2011년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오타구 산업진흥협회 직원이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하던 직원이 ‘봅슬레이 썰매는 모두 외국산’이라는 뉴스를 보고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제안에 30여 개 기업이 의기투합했다. 호소가이 대표는 “일본 동네 공장의 기술력을 세계에 알리고 제조업의 매력을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뭔가를 만드는 것에는 자신 있었지만 봅슬레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외국산 썰매를 해체해 도면을 만들고 200여 개 부품을 분담해 제작에 돌입했다. 출품이 예정된 전시회까지 남은 기간은 12일. 하지만 납기를 지키는 게 몸에 밴 동네 공장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조립해 완제품을 내놨다. 이들이 만든 봅슬레이 썰매는 2012년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기술력을 증명했다.

호소가이 대표는 “처음부터 세계에서 통하는 썰매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오타구 동네 공장의 기술력을 믿었다는 것이다. 오타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소기업 밀집지역으로 절단, 연마, 도금 등 금속가공업체 3500여 곳이 모여 있다. 종업원 10명 미만이 80%일 정도로 규모는 영세하지만 전문성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오타구에 어떤 도면이든 던지면 사흘 안에 제품으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쿠다 코지(田耕士) 오타구 산업진흥협회 과장은 “전후 고도성장기 수도권 게이힌(京浜) 공업지대의 대기업 공장에 납품하던 중소기업들이 모인 곳”이라며 “숙련된 기술자들이 독립하면서 1980년대에는 기업 수가 9200곳에 달했다”고 했다. 그는 또 “지금은 대기업의 신제품 시험 제작이나 공장기계 부품 공급 등 높은 정밀도가 필요한 고부가가치 작업을 담당하는 곳이 많다”며 “좁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모인 곳”이라고 강조했다.

프로젝트의 당초 목표는 2014 소치겨울올림픽이었다. 하지만 일본봅슬레이연맹은 외국산 썰매를 택했다. 동네 공장들은 첫 난관에 굴하지 않고 4년 후를 기약하며 썰매 개량에 매달렸다. 부품 제작 및 조립은 자체적으로 해결했지만 문제는 테스트였다. 일본에서는 시험주행을 할 수 있는 시설이 1998 겨울올림픽이 열린 나가노(長野) 경기장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용 가능한 기간은 1년에 단 2개월로 턱없이 짧았다. 호소가이 대표는 “예측을 통해 썰매를 만든 다음 시험주행을 거듭하며 데이터를 축적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사실상 힘들었다”며 “어쩔 수 없이 유럽으로 가야 했지만 썰매를 운송하는 데만 왕복 140만 엔(약 1500만 원)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난관에 부딪치자 응원해주는 이들이 나타났다. ‘동네 공장들이 기술력 하나로 세계무대를 두드린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일본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NHK 드라마,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다. 미국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서도 이들의 도전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러자 대기업들이 썰매에 로고를 붙이는 대가로 스폰서를 자청해 3500만 엔(약 3억80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중소기업 재조명 분위기 확산

올림픽 벽 뚫은 ‘변두리’표 봅슬레이

5월 29일 일본 도쿄 오다이바의 ‘원 러브 자메이카 페스티벌’ 행사에 참가한 오타구 ‘시타마치 봅슬레이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손수 제작한 썰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일보]

프로젝트팀은 장인정신을 발휘해 성능이 개선된 후속 모델을 연이어 내놨다. 하지만 지난해 일본 대표팀은 다시 독일산을 택했다. 두 번의 연이은 실패로 해산 위기에 놓인 프로젝트팀은 포기하는 대신 ‘무상제공’을 조건으로 해외 문을 두드렸다. 여기에 응한 것이 영화 ‘쿨러닝’으로 유명한 자메이카팀이었다. 자메이카팀은 1월 일본을 방문해 시험운행을 한 뒤 평창겨울올림픽에 함께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열대국가인 자메이카 대표팀은 소치겨울올림픽에서 최하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프로젝트팀의 설명이다. 호소가이 대표는 “미국 대표로 정상급 기량을 가진 재스민 팬레이터 선수가 최근 자메이카로 귀화했다. 더욱이 올가을에는 지금까지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성능이 좋은 썰매가 나오기 때문에 기대할 만하다”고 말했다. 팬레이터 선수는 시험주행을 한 뒤 “예전에 쓰던 BMW 썰매보다 낫다”고 평했다. 그는 현재 미국에 썰매를 가져가 맹훈련 중이다.

자메이카팀은 일본을 떠나며 “평창에서의 금메달도 꿈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오쿠다 과장은 “최근 봅슬레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한국 대표팀과 함께 평창에서 ‘아시아 붐’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최근 중소 제조기업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방영된 TBS 드라마 ‘변두리 로켓’은 오타구의 중소기업이 로켓 핵심 부품을 만드는 스토리로 연간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도전의 끝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라는 드라마 속 유행어를 인용했을 정도다. 실제로 오타구에는 비행기나 위성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회사가 상당수 있다.

제조 중소기업이 부각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고사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고 고도성장기에 회사를 세운 창업자들이 은퇴하면서 오타구의 중소기업 수는 전성기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봅슬레이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미래 역시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각오다. 오쿠다 과장은 “무엇을 구상하든 단기간에 만들어내는 오타구의 노하우를 앞세워 제조업 벤처 창업의 최적지라는 것을 홍보하고 있다”며 “봅슬레이 프로젝트 덕에 조금씩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16.06.08 1041호 (p58~59)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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