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1

2016.06.08

커버스토리 | 아니, 벌써? 불붙은 대선 레이스

치밀한 각본 ‘반기문 대권쇼’

대선구도 野野에서 與野로…차기주자로 눈도장, 친박에겐 정권 재창출 희망의 아이콘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6-06-03 16:5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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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를 생각지 마.’ 조지 레이코프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프레임’의 중요성을 이 같은 말로 함축적으로 설명했다. ‘코끼리를 생각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역설을 통해 프레임이 어떻게 사람의 인식과 사고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자신의 국내 행보에 대해 “오해 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보더라도 대통령선거(대선)와 연관 지어 해석할 만한 행보만 골라서 했다. 레이코프 식으로 말하자면 반기문발(發) ‘대선을 생각지 말라’였던 셈이다.



    전형적인 기름장어식 화법

    반 총장은 5월 25일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 참석해 “내년 1월 1일 나는 이제 한국 사람이 된다.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을 그때 가서 고민하고 결심하겠다”고 말했다. 대선이 예정된 2017년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심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곧 ‘대권 도전 시사’로 해석됐다. ‘한국사람’ ‘한국 시민’이란 말을 굳이 언급한 이유가 그 자신이 대선 피선거권을 가진 한국 국민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만약 반 총장이 “내년 1월 1일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지만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보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한 10년간의 경험을 살려 국제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반 총장은 5월 26일 오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으로 떠나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1박2일간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당초 개인 일정뿐이라던 28일 오전에는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30분간 만나 ‘비밀 얘기’를 나눴고 그날 저녁에는 노신영, 한승수, 고건 전 총리 등 각계 원로들을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29일 오전에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로타리세계대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한 뒤, 대통령 전용헬기를 타고 경북 안동으로 내려가 서애 류성룡 선생의 고택을 방문해 ‘제왕의 나무’라는 주목을 기념식수했다. 그리고 경북 경주를 찾아 30일 유엔 비정부기구(NGO) 콘퍼런스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이날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떠났다.

    반 총장이 일주일 가까이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는 사이 국내 정치권 이슈는 현란한 반 총장의 정치 행보에 대부분 묻혔다.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20대 국회 임기 개시라는 의회 권력 교체 시점에 ‘국회’ 대신 ‘반기문’이 주목받는 상황이 연출된 것. 특히 5월 19일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해 본회의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 이른바 ‘365일 청문회법’에 대해 아프리카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27일 온라인 결재로 ‘재의’를 요구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365일 청문회법’은 19대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반기문 대선 행보에 가려 찻잔 속 미풍에 그쳤고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반 총장의 대권 도전 시사 발언으로 정국이 들썩이던 5월 26일 새누리당은 친박(친박근혜)계 반발로 김용태 혁신위원장이 물러난 빈자리에 친박계와 가까운 김희옥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을 임명했다. ‘반기문 대선 행보 논란’을 방패 삼아 총선 패배 이후 지도부 공백 상태에 놓여 있던 새누리당이 내부 전열 정비에 나선 것.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에서는 “반기문 대권쇼에 한눈파는 사이 전면적인 새누리당 혁신의 기회는 물 건너간 느낌”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친박 책임론’이 ‘친박 효용론’으로

    5월 30일 반 총장은 마지막 일정 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취재진에게 “내 방한 중 활동과 관련해 오해가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국에 온 것”이라며 “국내에서 행동과 관련해 과대해석하거나 추측하거나 이런 것은 좀 삼가, 자제해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치권 인사들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유엔 사무총장과 동떨어진 정치 일정을 잔뜩 선보이고는 정작 그런 시각에 대해 발뺌하는 것은 전형적인 기름장어식 화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새누리당 비박계 한 인사는 “버라이어티 대선쇼를 선보인 반 총장이 쇼 막바지에 ‘이것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행한 다큐’라고 주장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야권 한 초선의원도 “5월 30일 경주에서 열린 유엔 NGO 콘퍼런스 참석 정도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해야 할 일정이었을 뿐, 나머지는 유엔 사무총장이 반드시 참석해야 할 행사였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반 총장의 방한 활동은 두 가지 점에서 ‘얌전한 고양이의 품격 제로 행동’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첫째는 유엔 사무총장의 일정이라기보다 국내 여론을 의식한 대권 행보를 보였다는 점. 다해놓고 아닌 척하는 반 총장의 언행 불일치 모습이 세간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는 기회주의로 비칠 수도 있다. 둘째는 현 여권과 정치 진로에 대한 교감이 있었다 해도 유불리를 떠나 본인을 정무직 공무원(장관)으로, 유엔 사무총장으로 지원한 고(故) 노무현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췄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의리보다 실리를 챙기는 출세주의라는 세간의 비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내 정치권은 반 총장 방한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무엇보다 반 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야권주자들의 대선 레이스가 빨라졌다(14쪽 기사 참조). 그뿐 아니라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범여권 차기주자의 대선 행보도 촉발했다. 총선 이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유 의원은 5월 31일 성균관대 특강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강연에 나섰다.

    반 총장의 방한을 계기로 친박계를 옭아매던 ‘총선 패배 책임’이란 프레임은 상당 부분 희석됐다. 20대 총선에서 공천을 주도했던 친박계는 총선 패배 책임론을 면키 어려운 상황. 그러나 반 총장이 방한해 경북 안동과 경주 등을 방문하며 내년 대선에서 ‘TK(대구·경북)+충청’ 연합 가능성을 흘리면서 ‘친박 책임론’이 ‘친박 효용론’으로 치환된 것이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친박계에게 반 총장은 총선 패배 책임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일 뿐 아니라,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보인 희망의 아이콘과도 같다”고 평가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새누리당을 휘감고 있던 총선 패배란 과거 프레임을 대선 승리 가능성이란 미래 프레임으로 바꾸는 데 반 총장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차기주자가 부상하면 레임덕을 막으려는 현재권력과 차기를 준비하려는 미래권력이 충돌해 갈등 상황이 연출되기 쉽다.

    그러나 한동안 국내에 머물지 않을 반 총장의 경우 예외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일례로 이명박 정부는 집권 4년 차이던 2011년 ‘주이야박’ 현상 때문에 크게 애를 먹었다. 낮에는 친이(친이명박)계로 활동하다 밤이 되면 친박계로 돌아서 임기 말이 가까워질수록 ‘영(令)’이 서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런 주박야반(晝朴夜潘), 즉 친박계의 야반도주(夜潘逃走) 상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반 총장에게 접근해 줄을 서고 싶어도 국내에 없는 사람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 결국 여권 인사들은 미우나 고우나 현재권력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여권 한 인사는 총선 참패 이후 반 총장이 국내를 돌며 대권 행보를 선보인 이후 새누리당 내부 기강은 물론, 공직 기강을 다잡는 데도 효과가 적잖을 것으로 내다봤다.

    “임기 말 현상인 레임덕은 정권교체 가능성이 커질수록 뚜렷하게 나타난다. 20대 총선 결과만 놓고 보면 박근혜 정권은 사실상 완전한 레임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회 과반 의석이 무너졌고, 원내 제2당으로 추락했다. 그런데 ‘반기문 대망론’이 뜨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여야 정권교체 가능성 못지않게 여권의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을 만든 친박계가 다음 정권 창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주주로 참여할 여지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권력누수 현상이 지연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반 총장은 5박6일간의 국내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번 한국행을 통해 반 총장은 국내에 ‘차기주자 반기문’이란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자신의 국내 행보에 대해 “오해 마라”면서도 그는 지난해처럼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남은 임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대선 여론조사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는 구체적인 요청은 하지 않았다.

    반 총장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난 직후인 5월 30일과 6월 1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에 따르면 반 총장은 25.3% 지지율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로 22.2%였다. 반 총장 방한 전 대선 여론조사는 문재인, 안철수 두 야권 후보의 양강구도였다. 하지만 반 총장의 한국 행차 이후 반기문, 문재인 여야 양강구도로 재편된 것이다(자세한 조사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반 총장은 이번 한국행을 통해 총선에서 대선으로 국면을 전환함으로써 자신에게 우군이 될 수 있는 친박계를 구원했을 뿐 아니라, 유력 차기주자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더욱이 국외자 신분인 반기문 대망론은 현 정부의 레임덕을 방지하는 효과까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반 총장 본인은 ‘반기문을 생각지 말라’는데, 자꾸만 반기문을 떠올리게 만드는 반기문 패러독스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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