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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하이 크라임’

“15년을 산 남편은 그림자였다”

  • < 정현상 기자 > doppelg@donga.com

“15년을 산 남편은 그림자였다”

“15년을 산 남편은 그림자였다”
영화관 밖 일상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정신없이 돌아간다. 권력 가진 이들의 비리는 우리를 절망케 하며, 지칠 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값은 그만큼 큰 분노를 자라게 한다. 괜히 손해보고 사는 느낌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잠시 모든 것 잊고 ‘영화 삼매경’에나 빠져볼까. 이럴 땐 어렵거나 철학적인 것 말고 단지 재미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제격일 듯.

할리우드가 제작한 스릴러영화 ‘하이 크라임’(High Crimes). 중대한 혹은 파렴치한 범죄라는 뜻이다. 거대악에 저항하는 주인공들이 제발 속 시원하게 이겨봤음 좋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해 보이는 모건 프리먼의 페르소나 때문에 영화는 한층 신뢰감이 간다. 다양한 장르의 배역을 소화하는 프리먼은 ‘쇼생크 탈출’에서 늙은 죄수 레드 역을, ‘딥 임팩트’에서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 역을 맡았던 배우다. 이 노련한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상대는 ‘키스 더 걸’에서 열연한 애슐리 주드.

“15년을 산 남편은 그림자였다”
시작부터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학살 장면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복선이다. 장면이 전환되면 세상에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은 매력적인 변호사 클레어 큐빅(애슐리 주드)이 남편 톰 큐빅(짐 카비젤)에게 ‘빌 앤 쿠’(Bill and Coo·애무하며 정답게 속삭이다)한다. “아이를 가질 시간이에요.” 숲 속에 파묻힌 대저택, 멋진 남편을 둔 명망 있는 인권변호사. 이 더없이 행복한 여성 앞에 불행이 다가온다.



들뜬 크리스마스 철의 어느 날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남편을 체포한다. 알고 보니 남편이 15년 전 엘살바도르에서 학살극을 벌인 살인마이며 탈영병이란다(미국에선 국가안보와 관련한 범죄에 시효가 없다). 본명은 론 채프먼.

이제까지 이 여자는 허상을 껴안고 살았던 것일까. 가장 가까운, 그림자와도 같은 남편이 15년 동안 자신을 속이고 살아왔다니.

여자는 어쨌든 되돌리고 싶다.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여겼던 남편이 그랬을 리 없다. 이건 음모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뒤로~ 돌앗!”이라고 부르짖듯 클레어도 과거를 향해, 행복을 되찾기 위해 돌진할 자세가 되어 있다. 클레어는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남편의 변호인을 자처한다. 그러나 군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처지.

“15년을 산 남편은 그림자였다”
여기서 전직 군법무관이던 찰리 그라임즈(모건 프리먼)가 등장한다. 노련한 찰리. 싸우는 것보다 타협하는 걸 더 좋아하는, 현실적인 퇴물 변호사다. 그러나 큐빅은 찰리의 인간적인 정서를 자극해 진실을 파헤치게 한다. 한 꺼풀씩 벗겨지는 군부의 음모. 그러나 이들을 방해하는 검은손들.

클레어가 미디어를 이용해 군부를 위협하자 마침내 군부는 국가 안보에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엉뚱한 핑계로 소를 취하한다. 드디어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얼싸안고 뒹구는 주인공들. 여기에서 그쳤다면 평범한 법정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다시 한번 비극의 대폭발을 준비해 뒀다.

현실이나 영화나 영원한 행복은 없는 것인가. 영화도 정직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무조건 승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이다. “절망 속에서도 우린 살아가야 하는 거야.” 술집에서 찰리가 한 말이다. 그래,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선 안 돼. 절망을 껴안고 분노를 삭이며 부동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는 삶으로….





주간동아 336호 (p88~89)

< 정현상 기자 >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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