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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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해요”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 이선영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15-09-18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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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해요”

    파키스탄에서 신생아를 돌보는 이선영 씨. 파키스탄에서는 외국 의료진도 반드시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써야 했다.

    2011년 이선영(48·사진) 씨는 대책 없이 병원을 그만뒀다.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뒤 산부인과 전문의로 석·박사를 취득하고, 미국 하버드 의대 연구원을 거쳐 분당 차병원 부인암센터 교수로 달려온 한 길. 누구보다 환자를 많이 봤고, 여러 논문을 발표했으며, 병원과 학계에서 인정받는 의사라고 생각했지만 그만두고 나니 병원이 안정된 직장도 아니고, 의사란 전문직도 별것 아니었다. 남들은 그가 개원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줄 알았지만 무작정 놀았다. 한두 달 그렇게 지내니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그때 떠올린 게 봉사였다.

    “구호활동을 위해 직장을 포기한 게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여러 단체에 지원서를 냈는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먼저 답이 온 것뿐이고요. 흔한 착각 가운데 하나가 봉사하겠다고 하면 ‘어서 오십시오’ 할 것 같지만 국경없는의사회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딱 닷새만 버텨봐라”

    첫 파견지인 파키스탄은 비자가 안 나와 끝내 가지 못했다. 이씨는 “NGO(비정부기구)라고 하면 비자가 척척 나올 거란 생각도 착각”이라며 “아침에 눈 뜨면 혹시나 비자가 나왔다는 문자메시지가 뜰까 싶어 휴대전화로 달려가기를 6개월간 했다”고 웃었다. 그때 “봉사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못 가게 되니까 더 가고 싶어졌다고 한다.

    “2012년 5월 나이지리아로 가게 됐죠. 드디어 아프리카에 왔구나, 한껏 기대에 부풀었는데 웬걸, 나이지리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온통 까만 사람들만 보이니까 사기가 딱 꺾이는 거예요. 공항에서 지프로 8시간을 달려 북쪽 국경 근처에 있는 ‘자훈’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했죠.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틀간 소변이 안 나오는 거예요. 사람 생명을 구하기는커녕 내가 먼저 죽겠다 싶더군요.”



    첫날 밤 아프리카 열대야가 지옥처럼 느껴졌고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씨는 석 달 먼저 이곳에 온 마취과 의사에게 “집에 가고 싶다. 아니, 가야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그 의사가 “나도 너랑 똑같았다. 닷새만 참을 수 있으면 몇 달도 견딘다”고 했다. “닷새만”을 되뇌며 병원에 갔다가 이씨는 두 번 놀랐다. 병원이란 게 딱 외양간 수준인 데다 분명히 산부인과라고 해서 갔는데 소아과에 잘못 온 줄 알았던 것.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다 어린 소녀들인 거예요. 10대 초·중반에 엄마가 되는 아이가 많고, 영양실조로 발육 상태가 나쁜 것도 이유일 수 있고요. 사실 환자들은 정확한 자기 나이도 잘 몰라요. 아기를 가졌으니까 어른이구나 하는 것뿐이죠.”

    막 우기가 지나 극성스러운 모기떼에 피를 빨린 산모는 대부분 어떻게 살아 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심각한 빈혈 상태였다. 영양실조와 말라리아에 시달리고 골반 발육이 제대로 안 된 소녀들이 임신과 출산을 하다 보니 순조로운 분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죽거나 출산 도중 산도에 걸려 죽은 채로 병원에 실려 오는 일이 흔했다.

    “나이지리아 산모들은 진통이 와서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99%가 발작을 해요. 임신중독증으로 혈압 조절이 안 되기 때문이죠. 모성사망률이 우리에 비해 300배, 아니 500배는 더 높다고 보면 돼요. 의학 교과서에서나 보던 일이 그곳에선 현실이죠. 수술방 옆에 질누공성형클리닉이 있었어요. 아이가 산도에 걸려 죽은 채 시간이 지나면 산모의 질과 직장에 혈액 공급이 안 돼 구멍이 생겨요. 제왕절개나 자궁적출수술도 그곳에서는 아주 어려운 수술이었죠. 피가 멈추지 않으면 손쓸 방법이 없거든요. 그런데 수술도구는 형편없어 ‘숟가락 하나 가지고 수술하라는 거구나’ 했죠.”

    첫날 회진을 하다 졸도를 했다. 한국에서 난소종양수술을 할 때 8~9시간씩 계속해도 끄떡없던 체력인데 아프리카 더위에는 장사가 없었다.

    “수술방이 너무 더워서 선풍기라도 돌리면 좋겠는데 온도가 떨어지면 산모 상태가 악화될 수 있어 그것조차 못 틀어요. 수술 후 고무장갑을 벗을 때 땀이 물처럼 쏟아졌죠. 수술하면서 ‘이 환자 상태라면 내일 시체를 치울 수도 있겠구나’라고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그다음 날 회진 때 그 환자가 저를 보고 반짝반짝 눈웃음을 보내요. 인간의 생명력이 이렇게 강하구나 싶기도 하고, 살아 있어줘 무척 고맙죠. 그렇게 닷새를 버티니까 더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족하면 내 피라도 뽑자”

    “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해요”

    남수단에서 구호활동 중 직접 헌혈을 하는 모습. 라오스의 수술실 동료와 함께. 레바논 샤틸라 난민캠프에서 환자와 상담하는 이선영 씨(위부터).

    나이지리아에서 한 달가량의 첫 미션을 무사히 마쳤지만 이씨는 솔직히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망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씨의 구호활동에 대한 동료들의 평가가 인색했던 게 오히려 자극이 됐다.

    “교수 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한 평가였어요. 자존심이 엄청 상했죠. 두 번까지는 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2013년 두 번째 파견 지역은 남수단이었다. 첫 미션 때는 지옥 같던 아프리카가 이번엔 천국 같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위도 참을 만했고 검은 피부 사람들이 잘생겼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구호활동 틈틈이 어떻게 하면 재밌게 보낼까 궁리할 만큼 여유도 생겼다.

    “산부인과는 피와의 싸움이에요. 피가 필요한 상황은 많은데 턱없이 부족하죠. 현지인은 대부분 심각한 빈혈 상태고, 여성들은 생리까지 하니 헌혈이 불가능했어요. 더 큰 문제는 피를 주면 영혼을 뺏긴다고 생각하는 문화였죠. 피가 모자라 죽어가는 환자를 붙잡고 엉엉 울기만 하고 정작 피를 나눠줄 생각은 하지 못해요.”

    딩카족 소녀도 그랬다. 아기를 사산하고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소녀를 살릴 방법은 수혈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봐도 건강한 사람은 이씨뿐이었다. 병원을 책임지고 있는 대장(호주에서 온 여의사)을 찾아가 허락을 구했다. 국경없는의사회 조직은 군대와 같아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 하물며 환자를 살리겠다고 온 의사가 헌혈을 한 뒤 쓰러진다면 더 큰일 아닌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기보다 의사로서 ‘죽는 꼴은 못 본다’고 보시면 돼요. 제 혈액형이 O형이고 환자는 A형이었어요. 이론상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해 전혈수혈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당장 부작용보다 살 가능성이 높으니 ‘하자’였죠. 제 피를 수혈받은 환자가 그다음 날 살아서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며 ‘아, 내 피가 굉장히 세구나’ 했어요.”

    입원 기간 내내 “내 딸 살려내라”며 난동을 피우던 소녀의 가족도 이씨에게 “당신은 이제 우리 가족”이라며 함께 사진을 찍고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결국 남수단에서는 예정했던 기간을 넘겨 한 달 이상 머물렀다. 제일 안 좋았던 기억을 물었더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남수단 병원의 사정이 나이지리아에 비해 나은 게 하나도 없었는데 천국처럼 느껴진 것을 보면 결국 다 제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남수단에 있을 때 전에 일하던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다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죠. 조건도 더 좋았어요. 구호활동을 계속할 것이냐 과거로 돌아갈 것이냐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 나를 더 필요로 할까를 생각했고, 국경없는의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다만 1년 내내 구호활동을 하는 게 아니니 한국에 머물 때는 병원에서 진료를 하기로 했어요. 지금은 다음 미션을 기다리며 아르바이트 의사를 하고 있어요.”

    국경의 불필요함을 배우는 의사회

    “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해요”
    세 번째 파견지는 라오스였다. 이곳은 앞의 두 나라와 달리 국경없는의사회의 구호활동이 이제 막 시작된 상태였다. 즉 당장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약품을 조달하고 병상을 마련하며 현지 의료인을 교육시키는 등 진료 외적인 일이 더 많았다. 한국에서는 의사가 진료하는 데 당연히 있어야 할 ‘시스템’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았고, 그것을 제때 마련하는 것도 구호활동가의 능력임을 깨달았다.

    네 번째 파견지는 그토록 인연이 닿지 않던 파키스탄이었다. 이씨는 지금까지 6개의 미션 국가 가운데 가장 ‘좋았던’ 곳으로 파키스탄을 꼽는다. 아침마다 어느 지역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부터 들려오는 살벌한 곳이지만 파키스탄에는 두 번 다녀왔다.

    “무슬림 여성들이 폐쇄적일 것 같아도 한번 친해지면 전혀 달라요. 지금도 제게 ‘너 어디에 있니, 보고 싶다’는 e메일을 보내와요. 조산사, 간호사 등 현지 의료인들이 보여준 배움에 대한 열정도 감동적이었죠.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모세대를 보는 것 같았어요.”

    이씨는 레바논에서의 구호활동을 마치고 7월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일부러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다음 미션 적응을 위해 준비한다”고 했다. 그가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시작한 지 5년째.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국경없는의사회의 구호활동은 불쌍하니까 돕자는 게 아니에요. 그 지역의 ‘사망률을 낮춘다’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죠.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24시간 붙어 지내다 보면 의식 속에서 국경이란 개념이 사라져요. 레바논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도 제게는 그냥 아기를 가진 엄마일 뿐이고요. 그래서 저는 ‘국경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의사회’라고 말해요.”

    레지던트, 동료 의사들 가운데 그에게 구호활동에 대해 묻는 이가 부쩍 늘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남을 돕는 게 아니라 나 좋으라고 하는 겁니다. 좋으면 가족에게 권하고 싶잖아요. 구호활동도 그래요. 지금 못 하면 영원히 못 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 설립과 구호활동

    ‘국경없는의사회’는 1971년 프랑스 의사들과 의학 전문 언론인들이 모여 설립한 인도주의 긴급 구호 단체다.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에서 비효율적인 원조활동과 참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던 상황에 대한 반성이 단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인종, 성별, 종교, 정치적 신념에 관계없이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인도적 의료 구호를 제공하고, 활동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공로로 9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5곳에 센터가 있으며 국제사무소 1곳과 28개 각국 지부가 운영 중이다. 2012년 문을 연 한국사무소(사무총장 티에리 코펜스)에는 현재 13명이 근무하고 있고, 30여 명의 구호활동가가 남수단,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말라위, 예멘, 레바논, 시에라리온 등지에서 활동해왔다. 의료활동 외에 관리와 지원 등을 맡은 비(非)의료인도 전체 구호활동가의 44%나 될 만큼 참여가 활발하다. 단체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의 89%를 개인 등 민간 후원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로부터 마련하고 있다. 문의 : 국경없는의사회 인터넷 홈페이지(www.ms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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