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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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속에 끈끈해진 두 거장의 우정

사전트가 그린 헨리 제임스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5-01-12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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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속에 끈끈해진 두 거장의 우정

    ‘헨리 제임스의 초상’, 존 싱어 사전트, 1913년, 캔버스에 유채, 85.1 x 67.3cm, 영국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소장.

    이 초상화가 영국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은 약간 의아하게 느껴진다. 초상화 주인공 헨리 제임스(1843~1916), 그리고 초상화를 그린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 1925) 모두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 자리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역대 영국 국왕과 왕비, 그리고 위대한 영국인의 초상화와 사진을 10만여 점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미국 화가인 사전트가 그린 미국 작가 제임스의 초상화가 이곳에 있는 걸까.

    ‘데이지 밀러’ ‘여인의 초상’ 등을 쓴 제임스는 마크 트웨인과 함께 19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미국 소설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소설 중 ‘나사의 회전’은 오페라로도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과 미국이 각기 그를 자국 작가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인 제임스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를 다녔으나 유럽에 대한 동경을 내내 품고 있었고, 30대 중반인 1876년 프랑스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계속 영국에 거주했으며, 죽기 전해인 1915년 영국 국적을 취득하기에 이른다. 미국 태생임은 분명하나 본격적인 작품은 대부분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과 라이(Rye)에 거주할 때 썼으니 굳이 따진다면 제임스는 영국 작가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의 초상화는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사전트가 밟은 삶의 궤적도 제임스와 비슷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배우고 인상파 화가들이 한창 활동하던 파리로 건너가 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막 화가로 유명해지던 무렵인 1884년 사전트는 살롱전에 출품한 ‘마담 X의 초상’으로 떠들썩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파리 언론은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흰 피부의 귀부인을 묘사한 이 초상화에 대해 “마치 시체처럼 창백하고 선정적”이라며 호들갑스럽게 비난했다. 사전트는 허겁지겁 런던으로 피난 아닌 피난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이때 사전트를 도운 이가 제임스였다. 사전트보다 열세 살 위인 그는 이미 영국에 정착해 ‘보스턴 사람들’ ‘카사마시마 공작부인’ 등 여러 작품을 발표한 상태였다. 사전트는 제임스의 소개로 런던 상류층의 초상화 제작 문의를 받게 되고 1887년 완성한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가 호평받으면서 영국에 안착한다.

    일찍이 미국을 떠났던 사전트의 초상화를 미국 화단에 다시 소개한 사람도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1887년 미국 잡지 ‘하퍼스 바자’에 그때까지 미국인에게 낯설었던 사전트를 소개하는 장문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사전트는 이런 도움 덕에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최고 초상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양쪽 나라 명사와 귀부인이 앞다퉈 그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사전트가 그린 미국 대통령 2명(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토머스 우드로 윌슨)의 초상화가 현재 백악관에 소장된 점만 봐도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해진 뒤에도 사전트는 젊은 시절 제임스에게 받은 도움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13년 제임스의 독자들과 후배 문인 269명이 뜻을 모아 그에게 제임스의 70회 생일 기념 초상화를 의뢰했다. 당시 사전트의 초상화 한 점 가격은 1억 원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전트는 제임스의 후원자 연합이 마련한 그림값을 끝내 받지 않았다. 초상화를 받아든 제임스는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고, 나무랄 데 없는 걸작”이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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