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통장과 연결된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대학생(왼쪽).
서울시내 A대학 재학생 송민근(24) 씨는 서울 B대학에 다니는 여자친구 C씨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데이트 비용은 모두 송씨가 계산한다. C씨는 고마워하는 기색조차 없다. “아예 지갑을 안 들고 나온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송씨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돈이 적게 든다고 말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비밀은 ‘데이트 통장’에 있다. 이 통장은 남녀가 데이트 비용을 함께 적립한 뒤 데이트할 때 꺼내 쓰는 통장이다. 요즘 20대 대학생 사이에서 이 통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송씨 커플은 5개월 전 이 통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말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송씨 커플을 만나 이들이 데이트 통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했다. 두 사람은 근처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1만3000원짜리 피자와 1만800원짜리 파스타를 시켰다. 송씨가 지갑에서 체크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데이트 통장과 연결된 카드다. 이들은 이어 극장에서 영화표를 끊었고 팝콘을 샀다. 영화 관람 후엔 커피전문점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물론 모든 비용은 체크카드로 지불했다. 총 4만8000원을 지출했는데 애초 두 사람이 반반씩 적립했으니 각자 2만4000원씩 쓴 셈이다.
요즘 20대 남성 상당수가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녀 더치페이(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것) 문화’로 넘어간 것도 아니다. 더치페이는 번거롭기도 하고 너무 계산적으로 비친다고 한다. 송씨는 “많은 커플이 대안으로 데이트 통장을 선택하고 있다. 내 경우도 결과가 만족스럽고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반반씩 입금 후 직불카드로
데이트 통장을 활용하는 방식은 커플마다 다르다. 송씨 커플은 데이트 통장에 잔액이 부족할 때마다 각자 3만~5만 원을 입금한다. 보통 한 달에 3번 정도 입금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송씨는 “과소비를 막기 위해 데이트 통장에서 한 번에 5만 원 이상 쓰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설명한다.
D대학 캠퍼스 커플인 박종민(23) 씨와 이혜민(22) 씨는 매월 1일 각자 15만 원씩 총 30만 원을 공동 계좌에 입금한다. E대학 차지현(가명·23) 씨 커플은 입금액과 날짜를 따로 정하지 않고 각자의 사정에 따라 자유롭게 입금한다. 특별한 목적으로 데이트 통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F대학 이선규(23) 씨는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기 위해 6개월 동안 매월 각자 10만 원씩 입금했다”고 말했다.
데이트 통장의 잔액이 떨어질 수도 있다. G대학 김보석(22) 씨는 추가로 입금하되 그 금액만큼 다음 달 입금액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해야 규칙적인 지출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H대학 좌혜은(24) 씨는 “잔액이 없으면 다음 입금일까지 데이트를 하지 않기로 하는 강경책을 써야 오랫동안 데이트 통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송씨는 여자친구와 서울 청계천을 걸으면서 “데이트 통장 자체가 하나의 추억거리”라고 말했다. “나는 입금할 때마다 입금자 명에 여자친구를 위한 따뜻한 글귀를 남긴다. 카드사용 명세서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행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했다. 이어 그는 “데이트에 최적화된 카드를 고르고, 모든 데이트 비용을 이 카드로 몰아 쓰다 보니 적립 포인트도 크게 늘었다”고 덧붙였다.
데이트 통장 가입이 늘어나는 것은 20대 남녀의 데이트 비용 부담이 점차 균일해지는 추세와 직접 연결돼 있다. 인터넷 아르바이트 정보 사이트 알바천국이 2014년 10월 연애 중인 20대 남녀 1232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상적인 남녀 데이트 비용 부담 비율’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자(42.1%)가 ‘6(남) 대 4(여)’를 꼽았다(그래프 참조). ‘실제 남녀 데이트 비용 분담 비율’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응답자(32.8%)가 ‘6(남) 대 4(여)’라고 답했다. 2년 전 같은 조사에선 ‘7(남) 대 3(여)’이었다.
데이트 통장 풍속은 20대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진 점과도 무관치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경제활동 참가율에서 20대 여성(64.6%)이 20대 남성(62.0%)을 앞질렀다. 정해윤 시사평론가는 “문과계열 여대생은 같은 계열 남학생에 비해 대개 학점이 좋고, 영어도 더 잘하며, 군대도 안 가 나이도 어리다. 아르바이트, 인턴, 정규직 구직에서 남녀 간 실력 차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에 따라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대고 여자가 남자를 따르는 전통적 성역할도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몇몇 대학생도 “취업난과 각종 스펙 준비로 남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어렵다. 여학생들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데이트 통장 만드는 데 선뜻 응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물론 남성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I대학 임성완(22) 씨는 “주변에선 아직 여자와 더치페이하면 ‘쪼잔한 남자’로 본다”고 말했다. 다른 일부 대학생도 “대개 여자가 먼저 제안하면 데이트 통장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대학생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미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 잡아가고 있고, 데이트 통장은 그 방향으로 가는 과도기적 양상인 듯하다. 박종민 씨는 “데이트 통장은 남녀가 반반씩 부담하면서 겉보기엔 남자가 계산하도록 체면을 세워줘 가부장적 인식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데이트 통장과 커플 애플리케이션(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자는 경제적으로 커플을 통합하고 후자는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커플을 붙여놓는다. 모 유명 커플 앱은 둘이서 24시간 문자를 주고받는 대화방, 함께 찍은 수많은 사진을 올려놓는 앨범, 둘만의 약속을 빼곡히 메모한 달력, 기념일에 선물을 구매할 쇼핑 공간을 제공한다. ‘오빠믿지’ 앱은 커플 남녀 각자의 현 위치와 과거 동선을 상대에게 전해준다. ‘커플각서’ 앱은 커플 중 누군가가 어떤 사람과 3분 이상 길게 연락하면 그 명세를 바로 커플 상대에게 전송한다.
커플 앱 개발자 이정행(27) 씨는 “우리 회사 앱의 다운로드 건수가 1000만 건에 이르렀다. 이용자 대부분이 20대 커플이며 생활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에 대한 40대 남자들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대기업 간부인 우모 씨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남자가 데이트 비용의 절반을 여자에게 부담시키면 그만큼 자신의 사생활을 여자에게 더 간섭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트 통장 때문에 새로운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J대학 재학생 정윤지(22·가명) 씨는 남자친구가 데이트 통장의 돈을 친구들과 노는 데 사용해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정씨는 “둘만 사용하기로 약속한 돈을 다른 사람들과 썼다는 데 감정이 상했다”고 했다. 데이트 통장을 쓰는 커플은 상대가 약속한 날짜에 입금하지 않더라도 독촉하기 어렵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결국 돈 때문에 서로 서먹해지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헤어진 후 데이트 통장을 정산하거나 해지하는 일이 문제다. 이선규(23) 씨는 “전 여자친구와 헤어질 때 통장에 남은 금액을 절반씩 나눠 가졌다”고 했다. K대학 구도운(23) 씨는 “내 친구는 헤어진 전 여자친구로부터 받아야 할 돈을 데이트 통장 잔액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데이트 통장은 합리적이고 성숙한 연애 방식일까. 이정행 씨는 이렇게 답했다.
“요즘 대학생 커플은 어느 한쪽에 부담을 지우기보다 함께 꾸려나가려 하죠. 좋은 일 아닙니까.”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과목 수강생들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