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만큼 한동안 연금 논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국민연금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연금 외에도 사보험, 기업연금 등 다양한 상품을 활용해야 한다.”
여제(女帝)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4년 12월 2일 독일연방 연금공단의 연금제도 125주년 행사에서 한 말이다. 한 나라의 총리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솔직한 느낌마저 드는 말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 공적연금은 세계 최초 연금이라는 사실이다. 1889년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도입한 연금제도는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국(1908), 프랑스(1910), 미국(1935), 일본(1941) 등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국가는 연이어 연금제도를 도입했다.
재정 부담에 시달리는 공적연금
연금제도는 태생적으로 정치적이었다. “늙었거나 병들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면 더 행복해하고 더 유순해져 다루기 쉽다.”(비스마르크) 정치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연금제도를 도입하면서 비스마르크는 안전장치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65세로 한 것. 당시 평균 수명이 50세가 채 안 됐으니 실제 연금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최초의 공적연금은 정치적으로 매우 뛰어난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인간이 미래를 볼 수 없듯이 당시 연금제도를 설계한 사람들도 인류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독일뿐 아니라 대부분 국가가 공적연금의 재정 부담을 걱정하고 있다. 대부분 나라에서 소득대체율을 낮춰 연금 지급액을 줄이고,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뒤로 미루는 방법 등을 통해 공적연금의 재정 부담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88년 국민연금을 처음 도입했을 때 소득대체율은 70%나 됐다. 소득대체율이 70%라는 것은 퇴직 전 소득이 100만 원이라면 연금으로 70만 원을 준다는 얘기다. 당시 비판론자들은 대체율이 너무 높아 향후 재정 부담이 클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노태우 정권은 그대로 강행했다. 그 비판은 현실이 됐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두 차례 연금 개혁을 거쳐 향후 40%까지 떨어질 예정이다.
국민연금 같은 공적연금은 찬반 여부를 떠나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제도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사망 시점까지 연금을 지급하는 상품은 민간 부문에서는 만들기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상품을 만드는 금융회사는 언젠가 파산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메르켈 총리의 말처럼 공적연금이 노후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대로 사적연금 기능은 더욱 커져야 한다. 먼저 우리나라 사적연금이 제구실을 할 수 있는지 그 현실부터 들여다보자. 사적연금은 공적연금을 제외한 퇴직연금, 개인연금, 예금 등을 포함한다. 사적연금은 2012년 456조 원에서 2020년 1013조 원으로 2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추정치). 규모는 커지지만 운용 현실은 몇 가지 극단적인 편향을 보이고 있다.
먼저 초저금리 기조가 고착화됐음에도 원리금 보장 상품에 편중돼 있다. 2000년대 이후 각종 연금 관련 상품의 이율이 절반 이상 하락했다. 연금저축 공시이율은 2008년 말 6%에서 2014년 12월 2.3%로 떨어졌고, 일반 연금보험도 같은 기간 6.6%에서 3.3%로 반토막 났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93%를 차지하는 원리금 보장형 퇴직연금도 2011년 5%에서 2.6%로 하락했다. 저금리로 운용 환경이 악화되는데도 여전히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인 패턴을 보이고 있다.
2명 중 1명은 10년 안 돼 연금 해약
금리가 높으면 사실 이런 방식의 자산운용이 문제될 건 없다. 그러나 금리가 낮아지면 은퇴자금을 만들기 위한 적립금액이 크게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20년간 2억 원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월 적립금액을 살펴보면, 5%일 때는 49만 원을 적립하면 되지만 2%인 경우에는 68만 원으로 증가한다. 비율로 따지면 약 38.7%p가 늘어난다. 만일 지금보다 금리가 더 낮아져 1%가 된다면, 매월 75만 원을 적립해야 한다(표 참조). 금리가 낮아질수록 수익률 1%가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초저금리 기조가 정착할수록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자산의 국내 집중화 현상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대표 사적연금인 퇴직연금, 연금저축계좌, 변액연금의 글로벌 투자 비중은 각각 0.7%, 0.4%, 9.3%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 경제의 골든타임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많다. 만일 모두의 바람처럼 다시 한 번 제2 도약을 한다면, 국내에 편중돼 있는 구조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설령 골든타임에 슬기롭게 대처했다 하더라도 기대 수익률이 과거보다 못하다면? 특히 연금처럼 장기간에 걸쳐 운용해야 하는 자산은 이런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한다.
사적연금의 유지율도 좋지 않다. 10년 이상 장기상품인 연금저축 유지율은 10년 차에 52.4%밖에 되질 않는다. 절반 이상이 10년을 못 버티는 것이다. 노후 대비용으로 많이 이용하는 변액연금도 9년 차 유지율이 20~30%에 불과하다. 5년 차 유지율도 절반이 되지 않는 36%로 낮은 편이다.
결국 우리나라 사적연금은 갈수록 낮아지는 금리에도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만 ‘몰빵’하는 구조다. 사적연금이 제구실을 하려면 먼저 시각 재조정이 필요하다. 공적연금에서는 소득대체율이 중요하듯 사적연금에서는 수익률이 중요하다. 수익률 1% 차이로 연금액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금리 기조가 심화할수록 수익률 1%의 중요성은 더 부각된다. 수익률을 올리면서 안정성까지 확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의 분산도 이뤄져야 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연금 논쟁을 하게 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신의 처지에 따라 대응 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공적연금의 기능은 갈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만일 공적연금을 확대하면서 재정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향후 역사적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사적연금의 구실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라면, 지금이라도 저금리·저성장이라는 시대적 환경에 맞게 운용 전략을 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