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2009년 공개한 신형 항공기의 비즈니스석.
하지만 초과 예약한 승객이 모두 공항에 나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럴 때 항공사에서 꺼내 드는 카드가 ‘좌석 승급’이다. 항공사로선 일반석 승객 중 초과분만큼을 상위 클래스 빈 좌석에 태워 보내 문제를 해결하고, 승객 처지에선 같은 돈을 내고 더 좋은 자리에 앉게 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승객이 단순한 승객이 아니라 항공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간동아’는 최근 대한항공 내부 제보자들로부터 유력 인사에 대한 좌석 승급이 관행처럼 이뤄진 정황이 담긴 문건과 증언을 확보했다. 이와 관련해 일명 ‘땅콩회항’ 사건에서 대한항공과 유착 의혹을 받는 국토교통부(국토부) 일부 공무원이 해외 출장 시 대항항공 측으로부터 무료 좌석 승급 혜택을 받아온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참여연대 측에서 “일부 판사도 이 같은 혜택을 수시로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현재 불법 좌석 승급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참여연대는 2014년 12월 26일 검찰에 국토부 공무원 3명의 대한항공 승급 혜택 사례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참여연대가 한 공기업 간부로부터 받은 제보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이 공기업 직원 2명이 국토부 직원들과 유럽으로 출장을 가면서 대한항공으로부터 무료로 좌석 승급 혜택을 받았다는 것.
국가공무원법 제61조 제1항에 따르면 공무원은 직무와 관련해 사례, 증여 또는 향응을 주거나 받을 수 없다. 또 국토부 공무원행동강령 제14조 제1항에는 ‘공무원은 직무 관련자로부터 금전, 부동산, 선물 또는 향응(음식물, 골프 등의 접대 또는 교통,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돼 있다.
2014년 12월 28일 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 의원은 국토부가 2014년 상반기(1∼6월)에 실시한 ‘서울지방항공청에 대한 감사 결과 처분요구서’를 분석한 결과 “2012년부터 2014년 2월까지 서울지방항공청 직원 13명이 총 18회에 걸쳐 공무 국외 출장 때 대한항공으로부터 무료로 좌석 승급 혜택을 받았다”고 밝혔다. 일부 직원은 2012년 국토부 정기종합감사에서 항공기 좌석 부당 승급 이용으로 지적돼 처분받았음에도 2013년 3월 16일 이스라엘 공무 국외 출장 귀국편 좌석을 대한항공으로부터 일반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승급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편의를 제공받은 직원들은 항공검사과 항공보안 감독, 관제과, 비행점검센터 등 항공안전 감독과 밀접한 부서였다.
강 의원은 “서울지방항공청 소속 공무원들이 대한항공으로부터 좌석 편의 제공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드러남에 따라 국토부 일부 직원과 항공사와의 고질적 유착이 광범위한 게 아닌지 의심된다. 승객의 항공안전을 위해서라도 항공사와의 유착과 내부 비리를 조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간동아는 대한항공 내부 제보자들로부터 “대한항공에서 좌석 승급 혜택을 제공받은 건 국토부 공무원뿐이 아니다”라는 증언을 확보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대한항공 내부 교육자료에는 탑승 수속 표준 업무 절차부터 기내 설비, 출입국 규정 등 사내 직원을 위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 중 라운지 이용 관련 항목에는 탑승 횟수와 누적 마일리지에 따라 대한항공 라운지 이용이 가능한 사람들의 등급이 나눠져 있다.
특정인에게만 예약 편의, 좌석 승급 혜택
내부 교육자료의 내용은 ‘전·현직 부총리 이상, 장차관급 이상, 국회의원, 국내외 주요 단체장 등을 VIP로, 공공기관·주요기관 비서실 인사, 언론사 회장·사장, 10대 그룹 회장·부회장, 30대 그룹 사장 등을 CIP로 구분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한항공 측은 이에 대해 “순전히 의전을 위한 분류”라고 항변하지만 내부 제보자들은 “여기 적힌 VIP, CIP 등급의 사람은 의전 편의뿐 아니라 수시로 좌석 무상 승급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특정 VIP가 공항을 이용한다는 소식이 해당팀 직원들에게 e메일 등으로 통보되고, 그럴 경우 무상 승급이 이뤄졌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한 제보자는 “VIP, CIP에 해당하는 사람의 경우 자비로 탑승권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어 비즈니스석을 타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VIP 측에서 특별한 요청이 없어도 향후 사측에 도움이 될 인사라고 판단되면 비즈니스석을 퍼스트석으로 승급해주거나, 일반석을 비즈니스석으로 승급해주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보자는 “무료 좌석 승급과 관련해 개인정보보호법, 해당 업무와 연관된 부서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 문제와 내부 고발자 색출 문제 등의 이유로 상세 내용을 언급하기 어렵다”며 “어떻게 보면 회사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내부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대한항공을 더 좋은 회사로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직원들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참여연대는 1월 6일 “‘대한항공이 알아서 좌석 특혜를 줬다’는 국토부 해명은 거짓이고, 국토부 항공 관련 부서에서 일상적으로 대한항공에 연락해 간부들과 수행 공무원이 해외 출장을 갈 때 좌석 특혜를 요구했다”는 공익 제보를 받은 사실을 공개했다. 또한 “법조계로부터 판사 등 사회 고위직에도 일상적으로 예약 및 좌석 특혜 등을 줬다는 제보를 받았다”고도 밝혔다.
참여연대는 “대한항공이 국토부 공무원뿐 아니라 여러 판사에게도 최소 수년 동안 각종 예약 편의를 제공해왔고, 경우에 따라서는 좌석 특혜도 제공했다. 대한항공 법무실에 언제든 연락만 하면 좌석을 예약 및 배정해줘 일부 판사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나 대한항공 관련 소송에 대비해 판사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어서 그랬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밝혔다. 최재혁 참여연대 간사는 “국토부가 좌석 특혜 문제에 대해 자체 감사를 진행한다고 하지만 이 같은 실태를 봤을 때 제대로 진상을 밝혀낼지 의문이다. 국민과 함께 검찰, 감사원이 철저한 수사와 전면적인 감사를 진행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런 내부 제보자의 의혹 제기에 대해 대한항공 측은 “VIP나 CIP에게 무상 승급을 제공한다는 내부 규정은 전혀 없다. 내부 매뉴얼에 VIP와 CIP를 나눠놓은 건 의전 편의를 위해서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대한항공 홍보팀 관계자는 “공무원이나 고위직이라 해서 좌석 승급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VIP는 공항에서 요청이 들어왔을 때 의전은 해줄 수 있지만, 좌석 승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버부킹이 됐을 때 일반석 승객을 상위 클래스로 승급시켜야 할 경우 그 나름의 원칙이 있다는 것.
홍보팀 관계자는 “이처럼 비자발적인 승급이 이뤄질 때 우선순위로 고려하는 대상은 항공사 마일리지를 많이 보유했거나, 일반석 이용객 중에서도 비교적 할인율이 적은 항공권을 소지했는지 여부다. 실제 VIP는 비행기 이용이 잦아 마일리지가 높은 경우가 많다 보니 우선적으로 좌석 승급 대상에 포함됐을 가능성은 있다. 좌석 승급에 대한 판단은 현장 지점에서 하는데, 해당 승객이 국토부 공무원인지 누군지는 전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향응인가, 의전인가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 국토부 직원들의 무상 좌석 승급에 대해선 “항공사 자체 승급제도에 의한 비자발적 승급으로, 이미 국토부에 소명한 상태”라며 “비자발적인 승급이라 해도 좌석 승급 자체가 향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14년 7월부터는 국토부로부터 협조를 요청받아 승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국토부는 2014년 7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측에 ‘항공기 좌석 임의 승급 제공 금지 등 국토부 청렴시책 협조 요청’ 문건을 보낸 상태다. 여기에는 △귀사의 자체 좌석 승급제도에도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항공안전감독관과 같이 직접 귀사에 대해 업무 감독을 하는 직원일 경우 임의 승급 금지(항공 마일리지 이용 등 정당한 이용자 제외) △직위 및 업무 관련성을 이용해 항공기 좌석 승급을 요구하는 직원은 국토부 행동강령책임관 또는 부조리신고센터로 신고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