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심을 얻고 싶은 자, 조선의 왕을 보라.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옥탑방 왕세자’ ‘더킹 투하츠’를 거쳐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이어진 ‘조선왕조실록’ 21세기판 ‘외전’은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서 절정을 이룬다. 조선 왕에 대한 이야기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 실제적 대선주자의 살길을 그 안에 담았다.
최근 1년여 동안 TV와 스크린에선 때 아닌 왕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미 왕은 ‘전제군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젊고 매혹적인 ‘스타’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득권층인 관료와 싸우는 시련 속 영웅이며 백성과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지도자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왕의 전성시대’는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우회적으로 21세기 민심을 드러낸다. 국민이 바라는 정치지도자상과 대중이 욕망하는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구현한다. 매력과 소통의 리더십, 매혹의 정치심리학, 쌍방향 소통의 통치철학이다.
배우 이병헌이 1인 2역을 맡은 ‘광해’는 광해군 시절의 조선 왕조사를 다시 쓴다. 실마리는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 중 “숨겨야 할 일은 ‘조보’(조정의 기록)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고 적힌 단 한 줄의 문장이다. 광해군 재위 시절, 기록에 없는 15일간 광해군의 대역, 즉 ‘가짜 광해’가 왕좌를 지켰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 당파 간 정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의 일이다. 수라상에 놓인 은수저는 때때로 검게 변하고, 역모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적들이 유생을 동원해 궁궐 앞길을 막는 일이 횡행하던 위험한 시대다. 광해(이병헌 분)는 정적들이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와 분노 속에 점점 광폭해진다.
“나와 닮은 자를 찾으라”
불안을 견디다 못한 광해는 도승지 허균(류승룡 분)에게 “나와 닮은 자를 찾으라”는 비밀 지시를 내린다. 방패가 돼줄 대역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마침내 허균은 마땅한 인물을 발견한다. 저잣거리 술집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노닐며 왕을 희롱하고 걸쭉한 음담패설을 쏟아내며 기생밥을 먹는 광대 하선(이병헌 분)이다. 광해와 외모가 꼭 닮은 것은 물론이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광해의 행동까지 똑같이 흉내 내는 인물이다.
궁궐로 불려간 하선은 광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하룻밤 대역을 맡는다. 그러던 중 광해가 독살시도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허균은 조정의 혼란과 정적의 발호를 막으려고 왕을 빼돌려 치료하는 한편, 하선으로 하여금 왕좌를 지키게 한다. 본격적인 대역의 시작이다.
영화는 천출 광대 하선이 졸지에 ‘조선의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웃음을 선사한다. 기상 후 손을 씻으라고 올린 물을 단숨에 들이켜거나 궁녀 십수 명이 보는 앞에서 대변을 보며 쩔쩔매는 모습 등이 그렇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대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소를 읽고 결재를 하며 회의를 주재하는 등 왕의 임무를 배워가는 장면도 볼거리다.
이병헌의 연기는 절정이다. 부조리한 정쟁이 갉아먹은 순수한 영혼, 상처 입은 짐승의 눈빛, 잔혹함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광해가 이병헌의 한 얼굴이라면, 어수룩하고 비굴한 표정 속에 불현듯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대범한 찰나를 드러내는 하선의 낯은 ‘이병헌 이상의 이병헌’이다. ‘광해’는 불쑥불쑥 농담을 던지면서도 비장하고 근엄한 정조를 잃지 않는다. 이병헌과 류승룡이 능수능란하게 수작을 펼쳐가는 저음의 목소리는 매 순간 관객에게 짜릿한 긴장감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소유한 농지에 따라 세를 부과한다는 대동법과 가가호호 신원을 파악해 부역을 정한다는 호패법을 두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던 때다. 광해와 허균은 두 정책을 밀어붙이려고 하지만, 지주와 결탁한 반대파는 충신에 대한 모함과 중전의 폐위 요구로 맞선다. 양반의 횡포와 민초의 고난을 몸소 경험한 하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리만 지켜달라”던 허균의 지시를 어기고 잇따라 돌발적인 어명을 내린다. 처음엔 흉내였지만 어느새 하선은 진짜 왕이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적들은 하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광해가 깨어나면서 궁궐은 폭풍 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인다.
스타가 된 지도자
당대 가장 강력한 기득권 집단인 신권에 위협받고 탄압받으면서도 이를 혁파하고 백성과 소통하며 애민정책을 펼치는 왕의 모습은 최근 사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광해’뿐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이나 ‘해를 품은 달’의 이훤도 마찬가지였다. 왕권을 넘어서는 무소불위 통치권은 물론이고 당대 상업과 경제를 장악한 ‘신권’은 현대 기득권층이나 부패한 관료집단, 재벌과 밀착한 권력을 표상한다. 신권을 혁파하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지도자에 대한 갈망은 급기야 ‘광해’의 ‘왕이 된 천민’이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거지가 된 왕’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냈다.
왕이 당대 스타이자 만인의 연인으로서 로맨스 주인공이 된다는 점도 최근 사극에 나타나는 특기할 만한 경향이다. ‘광해’에선 하선이 진짜 광해와 다르게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러스한 면모를 보여주며 궁녀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본래 신분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중전(한효주 분)을 흠모해 애틋한 연애시를 바치는 에피소드도 있다. 중전을 폐위하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나 보고 조강지처를 버리라는 말이냐”며 중전 손을 잡고 뛰어 달아나는 하선의 모습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정치적 경력이나 이념, 정책뿐 아니라 성적 요소를 포함하는 정치인의 개인적 매력이 대중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최근 흐름을 반영한다. 이른바 ‘정치인 스타화’ ‘정치인을 향한 팬덤 현상’이다.
‘광해’를 비롯한 최근 잇따른 조선 사극은 사실(史實)과 허구를 결합한 이른바 ‘팩션’을 표방한다. 그리고 21세기 민심은 팩션에 담긴 반쪽짜리 거짓 이야기,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야말로 오히려 ‘전면의 진실’임을 강조한다.
최근 1년여 동안 TV와 스크린에선 때 아닌 왕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미 왕은 ‘전제군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젊고 매혹적인 ‘스타’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득권층인 관료와 싸우는 시련 속 영웅이며 백성과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지도자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왕의 전성시대’는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우회적으로 21세기 민심을 드러낸다. 국민이 바라는 정치지도자상과 대중이 욕망하는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구현한다. 매력과 소통의 리더십, 매혹의 정치심리학, 쌍방향 소통의 통치철학이다.
배우 이병헌이 1인 2역을 맡은 ‘광해’는 광해군 시절의 조선 왕조사를 다시 쓴다. 실마리는 ‘조선왕조실록-광해군일기’ 중 “숨겨야 할 일은 ‘조보’(조정의 기록)에 내지 말라 이르다”라고 적힌 단 한 줄의 문장이다. 광해군 재위 시절, 기록에 없는 15일간 광해군의 대역, 즉 ‘가짜 광해’가 왕좌를 지켰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 당파 간 정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의 일이다. 수라상에 놓인 은수저는 때때로 검게 변하고, 역모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적들이 유생을 동원해 궁궐 앞길을 막는 일이 횡행하던 위험한 시대다. 광해(이병헌 분)는 정적들이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와 분노 속에 점점 광폭해진다.
“나와 닮은 자를 찾으라”
불안을 견디다 못한 광해는 도승지 허균(류승룡 분)에게 “나와 닮은 자를 찾으라”는 비밀 지시를 내린다. 방패가 돼줄 대역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마침내 허균은 마땅한 인물을 발견한다. 저잣거리 술집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노닐며 왕을 희롱하고 걸쭉한 음담패설을 쏟아내며 기생밥을 먹는 광대 하선(이병헌 분)이다. 광해와 외모가 꼭 닮은 것은 물론이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광해의 행동까지 똑같이 흉내 내는 인물이다.
궁궐로 불려간 하선은 광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하룻밤 대역을 맡는다. 그러던 중 광해가 독살시도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고, 허균은 조정의 혼란과 정적의 발호를 막으려고 왕을 빼돌려 치료하는 한편, 하선으로 하여금 왕좌를 지키게 한다. 본격적인 대역의 시작이다.
영화는 천출 광대 하선이 졸지에 ‘조선의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웃음을 선사한다. 기상 후 손을 씻으라고 올린 물을 단숨에 들이켜거나 궁녀 십수 명이 보는 앞에서 대변을 보며 쩔쩔매는 모습 등이 그렇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대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소를 읽고 결재를 하며 회의를 주재하는 등 왕의 임무를 배워가는 장면도 볼거리다.
이병헌의 연기는 절정이다. 부조리한 정쟁이 갉아먹은 순수한 영혼, 상처 입은 짐승의 눈빛, 잔혹함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광해가 이병헌의 한 얼굴이라면, 어수룩하고 비굴한 표정 속에 불현듯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대범한 찰나를 드러내는 하선의 낯은 ‘이병헌 이상의 이병헌’이다. ‘광해’는 불쑥불쑥 농담을 던지면서도 비장하고 근엄한 정조를 잃지 않는다. 이병헌과 류승룡이 능수능란하게 수작을 펼쳐가는 저음의 목소리는 매 순간 관객에게 짜릿한 긴장감과 통쾌함을 선사한다.
소유한 농지에 따라 세를 부과한다는 대동법과 가가호호 신원을 파악해 부역을 정한다는 호패법을 두고 조정에서 설왕설래하던 때다. 광해와 허균은 두 정책을 밀어붙이려고 하지만, 지주와 결탁한 반대파는 충신에 대한 모함과 중전의 폐위 요구로 맞선다. 양반의 횡포와 민초의 고난을 몸소 경험한 하선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리만 지켜달라”던 허균의 지시를 어기고 잇따라 돌발적인 어명을 내린다. 처음엔 흉내였지만 어느새 하선은 진짜 왕이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적들은 하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광해가 깨어나면서 궁궐은 폭풍 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인다.
스타가 된 지도자
당대 가장 강력한 기득권 집단인 신권에 위협받고 탄압받으면서도 이를 혁파하고 백성과 소통하며 애민정책을 펼치는 왕의 모습은 최근 사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광해’뿐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이나 ‘해를 품은 달’의 이훤도 마찬가지였다. 왕권을 넘어서는 무소불위 통치권은 물론이고 당대 상업과 경제를 장악한 ‘신권’은 현대 기득권층이나 부패한 관료집단, 재벌과 밀착한 권력을 표상한다. 신권을 혁파하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는 지도자에 대한 갈망은 급기야 ‘광해’의 ‘왕이 된 천민’이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거지가 된 왕’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냈다.
왕이 당대 스타이자 만인의 연인으로서 로맨스 주인공이 된다는 점도 최근 사극에 나타나는 특기할 만한 경향이다. ‘광해’에선 하선이 진짜 광해와 다르게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러스한 면모를 보여주며 궁녀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본래 신분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중전(한효주 분)을 흠모해 애틋한 연애시를 바치는 에피소드도 있다. 중전을 폐위하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나 보고 조강지처를 버리라는 말이냐”며 중전 손을 잡고 뛰어 달아나는 하선의 모습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정치적 경력이나 이념, 정책뿐 아니라 성적 요소를 포함하는 정치인의 개인적 매력이 대중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최근 흐름을 반영한다. 이른바 ‘정치인 스타화’ ‘정치인을 향한 팬덤 현상’이다.
‘광해’를 비롯한 최근 잇따른 조선 사극은 사실(史實)과 허구를 결합한 이른바 ‘팩션’을 표방한다. 그리고 21세기 민심은 팩션에 담긴 반쪽짜리 거짓 이야기,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야말로 오히려 ‘전면의 진실’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