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도시인데 기차로 16시간이나?” 답은 간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철로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시속 60km로 달리는 기차에 태국의 모순이 담겼다. 세계적 기업이 즐비한 방콕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만 달러를 넘나든다. 하지만 수도권을 벗어나면 여느 저개발 동남아국가와 차이가 없다. 저조한 사회간접자본, 낮은 임금, 그리고 극심한 빈부격차.
이런 까닭에 태국은 올해 사상 최대의 홍수 피해국이 됐다. 3개월에 걸쳐 북부지역에 쏟아진 홍수가 대평원을 거쳐 방콕으로 흘러들었지만 인프라가 부족해 속수무책이었다.
“농촌 투자계획을 대대적으로 실행한 2005년에 종합홍수대책을 세웠어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아쉬워요.”
풍운아 탁신 친나왓(61)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탁신은 한국의 4대강 프로젝트 시찰을 위해 최근 방한했다. 탁신 여동생은 올해 7월 태국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총리로 취임한 잉락 친나왓(44). 그러니까 재난수습에 여념 없는 동생을 대신해 한국의 4대강 정비사업을 배우러 온 것이다. 이해는 가지만 상황이 묘하다. 그는 부패혐의로 여전히 태국을 떠나 망명 중인 인사 아닌가.
2001년 총리에 취임한 탁신은 재임에 성공했지만, 2006년 9월 태국의 19번째 쿠데타로 실각했다. 3년 전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태국입국이 불허됨은 물론, 재산 상당액도 압류된 상태다. 서방세계에선 그를 ‘부패정치인’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태국에서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2008년 그의 대리인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번엔 군부가 아닌 사법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당이 해산됐다. 올해 총선에선 아예 여동생을 내세워 권력을 되찾았다. 2001년부터 치른 5번의 선거에서 5번 모두 승리를 거둔 것이다.
3개월에 걸쳐 사상 최대 홍수 피해
남한강 여주보(11월 22일)와 금강 세종보(11월 23일)를 둘러보고 서울로 상경하는 그와 KTX 특실에서 마주했다. 그의 집권 키워드는 ‘태국의 현대화’였다. 낙후된 농촌과 북부지역에 집중 투자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국민이 따라오지 못했어요. 학자들의 비판도 극심했죠.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반대파들은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할 뿐이었어요. 이게 근본적인 차이라고 봅니다.”
실제 그는 가난한 농촌과 지방을 혁신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실각하자 방콕을 점령한 ‘레드셔츠’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탁신에 반대했던 방콕시민과 특히 아피싯 전 총리(민주당)는 그를 부패정치인이라고 몰아세우며 거부했다.
“천만에요. 당시 태국 국민이 진실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군부와 왕정주의자들이 수십 년간 언론을 장악하고 권력을 독점했어요. 나를 방치하면 그런 모든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죠. 나에 대한 왜곡이 너무 심해요.”
실제 그에게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포퓰리스트란 선거를 위해 우매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데만 골몰한 정치인을 일컫는다. 그런 논란을 의식했는지, 그도 조심스럽게 외국인인 기자에게 자기 홍보를 시도했다. 최근 발간된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톰 플레이트의 ‘아시아의 거인들’ 시리즈를 언급한 것이다.
“그 책의 1권이 리콴유예요. 2권이 마하티르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몇 권일 것 같나요? 4권이에요. 내가 3권이더군요.”
“여동생이 총리, 정치 안 합니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도피해 있는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7월 4일 자신의 고급 빌라 앞에서 여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 후보가 이끈 푸어타이당의 총선 압승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11월 23일 금강 세종보를 둘러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일행.
KTX는 미끄러지듯 서울로 향했다. 탁신이 기자에게 커피를 권했다. 반기문 사무총장 얘기가 나오자 그를 한국으로 초청한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이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당시 수라키앗 태국 외무장관도 유엔 사무총장 후보였지만 탁신이 그를 주저앉히고 반 총장 지지를 결정했어요.”
수라키앗은 중간투표에서 3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중도 포기했다. 하지만 이후 태국이 인도가 아닌 한국 후보를 지지한 것과 관련해 탁신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의 관계도 간단치 않았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에요. 앞선 두 번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빈이었죠. 당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나를 마중 나왔어요. 그런 인연으로 시작해 결국 그의 유엔 사무총장 도전을 지지했습니다.”
이뿐이 아니었다. 그의 집안에는 6·25전쟁 참전군인이 있다고 했고, 그가 소유한 태국 민영방송 ITV가 한국 드라마를 집중 방송해 태국의 한류붐의 초석을 닦았다고 소개했다.
“아리랑TV를 자주 보고 있어요. 한국과 태국은 앞으로 더 가까워질 겁니다.”
화제는 태국 홍수로 이동했다. 공식 피해 추산은 150억 달러(17조 원)지만 일각에선 100조 원 이상의 손실을 언급한다. 동남아 최대의 산업국가 태국이 이번 재난으로 성장동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심각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대부분 피해가 일본 기업에 집중됐어요. 일본 정부와 재계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3~4개월 뒤면 회복 가능할 전망입니다. 오히려 태국에겐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탁신은 한국수자원공사의 4대강 관련 설명을 듣고 “태국 환경에도 참고할 만한 정보가 많았다”며 만족해했다.
“물론 정치 신인이죠. 하지만 동생도 비즈니스 배경을 갖고 있어요. 통신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서른다섯 살부터 CEO 수업을 받았죠. 맡은 일을 잘해왔고 전문성도 있어서 충분히 사랑받는 총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잉락 총리에게는 홍수가 문제가 아니라, 큰오빠이자 정국 뇌관인 ‘탁신’이 더 위험요소라는 게 세계 언론의 분석 아니든가.
“나는 정치 안 합니다. 여동생이 총리인걸요. 다만 나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고 5년간 외국에서 희생해왔어요. 태국에 가고 싶지만 정치적 논란을 야기하면서까지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나는 하나의 해결책이 되고 싶어요. 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위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에요.”
노련한 발언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3가지다. 사면을 통한 복귀, 정계 은퇴, 갈등 종식. 실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인사가 해외에 머무는 일은 어색하다. 여동생이 총리지만 ‘사면’은 국왕의 허락이 필요한 영역이다. 왕정주의자들은 “탁신이 돌아오면 공화국을 세워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공포에 질려 있다. 양측은 여전히 신뢰가 부족하다. 태국 정치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빙글빙글 헛도는 이유다. 전날 탁신은 남한강 이포보를 방문하기로 했지만, 오후 2시에 여주보까지만 살펴보고 그대로 호텔로 되돌아갔다. 날씨가 추워서 그랬을까.
“아니에요. 내가 두바이에 살잖아요. 시차가 달라 너무 졸리더군요.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영특한 머리 비즈니스 감각 뛰어나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그는 남한강과 금강, 그리고 한국수자원공사를 방문해 매우 유심히 4대강 사업을 둘러봤다. 무척이나 꼼꼼하게 실무자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질문 공세를 펼쳤다. 4대강 모델과 종합홍수통제 시스템을 수출하려고 태국 상황을 1년간 연구했다는 한국수자원공사 전문가들도 쩔쩔맸다. 하지만 한국과 태국의 지형은 완전히 다른데 어떤 대목을 참고하겠다는 걸까.
“물론 달라요. 태국은 강도 더 많고 길이도 훨씬 길어요. 한국식으로 하려면 예산이 몇 배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강폭을 넓히고 수심을 깊게 하는 등의 방법은 태국에 유용한 선례가 될 거예요. 태국은 여러모로 현대화가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의 한국 방문을 두고 국외 추방자라는 위상과 4대강 공사 적절성 논란이 맞물리면서 적잖은 비판기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논란을 피하는 여유를 내비쳤다. 그가 쏟아낸 질문 중엔 ‘강 주변 농민의 보상’ ‘환경론자들의 반발’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KTX가 어느새 광명역에 다가섰다.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대전과 서울의 거리가 너무 짧았다.
그는 2008년까지 맨체스터시티 구단주였다. 2006년 영국으로 망명한 그는 곧장 이 하위권 축구클럽을 인수했다. 이어 두바이로 이동해선 세계 최대의 재벌왕족 만수르에게 되팔았다. 상당한 시세차익을 거뒀을 것이다. 그런 맨체스터시티는 현재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1위를 달리는 최고 클럽으로 거듭났다. 그가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사업가라는 얘기다.
“아쉬움은 없어요. 만수르는 나보다 훨씬 능력이 많은 인물이기에 클럽을 잘 키울 것이라고 믿었어요. 물론 나도 돈은 충분했죠. 하지만 만수르의 지갑은 나보다 깊고, 또 깊고, 훨씬 깊었으니까요(웃음).”
그는 이 대목에서는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기자가 “맨체스터시티 구입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칭송하자 그가 “팬을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고 답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집권 이후 그의 정치행보는 ‘팬(열성 지지자)’을 고려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에게 감동한 농민은 레드셔츠로 단결해 군부와 싸웠다. 그는 ‘민주주의 영웅’으로 불리면서 한편으론 영특한 비즈니스맨이었던 셈이다. 그는 집권기간에 더 큰 부를 쌓았다.
KTX가 서울역에 당도하고 그의 일행은 자동차로 갈아탄 뒤 유유히 역을 빠져나갔다. 경호원은 없었지만 총리급 예우는 확실했다. 그는 한국의 KTX와 4대강 현장에서 무엇을 봤을까. 태국의 현대화일까, 혹은 국가 예산을 활용한 사업기회일까. 이 두 가지의 분리는 어느 국가나 쉽지 않을 터. 태국의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