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TV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이나 ‘정글의 왕자, 레오’ 등을 보면서 과학자를 꿈꾸고 정글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手塚治忠·1928~1989)가 만들었다.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오사무의 작품이 일본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세계 어린이의 동심을 자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람의 역할이 컸다. (주)데즈카 프로덕션 마쓰다니 다카유키(松谷孝征·67) 사장이다.
다카유키 사장은 오사무의 수많은 TV 만화영화 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등을 기획했고 회사의 경영, 마케팅도 전적으로 담당했다. 그가 3월 20일까지 경기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만화예술축제’(이하 ‘축제’)를 관람하고, 올해 말로 계획된 ‘데즈카 오사무 한국전’(이하 ‘한국전’)을 준비하러 3월 19일 내한했다. 이번 ‘축제’에는 데즈카 오사무의 인기 캐릭터를 한자리에 모은 원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이 전시됐다.
“보통 일본 만화 원화는 해외로 반출하지 않고, 대신 원화와 똑같이 출력한 작품을 전시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올해 말로 예정된 ‘한국전’을 위해 파격적으로 이번 축제에 선보인 거죠(웃음). 축제는 좋았지만, 오사무 선생의 작품은 조금밖에 선보이지 않아 무척 아쉬웠어요. 앞으로 있을 ‘한국전’에서 그 아쉬움을 풀 수 있겠죠.”
1972년 만화잡지 편집장이었던 그가 데즈카 오사무의 연재를 담당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1989년 오사무가 별세할 때까지 만 16년 동안 함께 일했다. 그는 “일주일에 5일, 하루 8시간 이상 같이 있으며 작업했다”며 “오사무 선생은 훌륭하고 친절한 분이었지만, 작업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면서 허허 웃었다. 그는 1973년 오사무의 매니저로 (주)데즈카 프로덕션에 입사한 후 1985년 사장으로 취임했다.
“오사무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칠흑같이 어두웠던 도쿄의 밤이 전쟁이 끝난 후 하나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생활하는 걸 보면서,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생명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죠. 1950년대에 ‘정글대제’를 그리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생각했고, ‘철완 아톰’을 그리면서 ‘과학 발달이 무조건 인류에게 좋은 건 아니니, 제대로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때 일본은 ‘과학 발전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때였거든요. 오사무 선생은 60년을 앞서간 선각자였죠.”
지금 (주)데즈카 프로덕션은 1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연 20억 엔(약 28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이익을 좆지 않고 ‘생명과 평화’라는 데즈카 오사무의 정신을 전달하려고 애쓰자 회사가 서서히 하지만 탄탄하게 커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올해 말에 있을 ‘한국전’을 통해 많은 한국인이 데즈카 오사무의 정신을 알게 되면 좋겠어요. 또 이번 ‘축제’에서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봤는데 무척 창의적이고 뛰어난 솜씨에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만화만 그리지 말고 인문학적·예술적 소양을 두루두루 갖추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이는 오사무 선생이 항상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다카유키 사장은 오사무의 수많은 TV 만화영화 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등을 기획했고 회사의 경영, 마케팅도 전적으로 담당했다. 그가 3월 20일까지 경기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만화예술축제’(이하 ‘축제’)를 관람하고, 올해 말로 계획된 ‘데즈카 오사무 한국전’(이하 ‘한국전’)을 준비하러 3월 19일 내한했다. 이번 ‘축제’에는 데즈카 오사무의 인기 캐릭터를 한자리에 모은 원화를 비롯해 여러 작품이 전시됐다.
“보통 일본 만화 원화는 해외로 반출하지 않고, 대신 원화와 똑같이 출력한 작품을 전시하게끔 합니다. 하지만 올해 말로 예정된 ‘한국전’을 위해 파격적으로 이번 축제에 선보인 거죠(웃음). 축제는 좋았지만, 오사무 선생의 작품은 조금밖에 선보이지 않아 무척 아쉬웠어요. 앞으로 있을 ‘한국전’에서 그 아쉬움을 풀 수 있겠죠.”
1972년 만화잡지 편집장이었던 그가 데즈카 오사무의 연재를 담당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1989년 오사무가 별세할 때까지 만 16년 동안 함께 일했다. 그는 “일주일에 5일, 하루 8시간 이상 같이 있으며 작업했다”며 “오사무 선생은 훌륭하고 친절한 분이었지만, 작업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면서 허허 웃었다. 그는 1973년 오사무의 매니저로 (주)데즈카 프로덕션에 입사한 후 1985년 사장으로 취임했다.
“오사무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칠흑같이 어두웠던 도쿄의 밤이 전쟁이 끝난 후 하나둘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활기차게 생활하는 걸 보면서,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생명과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죠. 1950년대에 ‘정글대제’를 그리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생각했고, ‘철완 아톰’을 그리면서 ‘과학 발달이 무조건 인류에게 좋은 건 아니니, 제대로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때 일본은 ‘과학 발전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때였거든요. 오사무 선생은 60년을 앞서간 선각자였죠.”
지금 (주)데즈카 프로덕션은 1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연 20억 엔(약 28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는 “이익을 좆지 않고 ‘생명과 평화’라는 데즈카 오사무의 정신을 전달하려고 애쓰자 회사가 서서히 하지만 탄탄하게 커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올해 말에 있을 ‘한국전’을 통해 많은 한국인이 데즈카 오사무의 정신을 알게 되면 좋겠어요. 또 이번 ‘축제’에서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봤는데 무척 창의적이고 뛰어난 솜씨에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만화만 그리지 말고 인문학적·예술적 소양을 두루두루 갖추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이는 오사무 선생이 항상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