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흑돈의 뒷다리로 만든 생햄이다. 세계 명품에 들 만한 맛을 낸다.
돼지 뒷다리가 특히 남아도는 것은 이 부위를 굽거나 삶으면 퍽퍽하기 때문이다. 족발로도 인기가 없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뒷다리를 일정하게 가공하면 돼지고기 가공품 중 최고의 상품이 된다. 하몽(스페인식 생햄), 프로슈토(이탈리아식 생햄) 등으로 부르는 생햄이다. 뒷다리를 익히지 않고 소금에 절여 1년 이상 발효시킨 햄이다.
국내 양돈업계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돼지 뒷다리의 처분을 위해, 또 싼 가격의 이 뒷다리로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해 생햄 개발을 시도했다. 축산 기술을 개발하는 공공기관에서도 하몽 또는 프로슈토 레시피를 연구해 양돈 농가에 보급했다. 그래서 식품박람회 등에 ‘한국식 하몽’ ‘한국의 프로슈토’를 내세운 생햄이 종종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필자도 그 덕에 한국의 생햄을 두루 맛보았다. 그러나 그 맛에는 크게 실망했다. 소비자들도 내 입맛과 비슷했는지 시장에 본격적으로 판매되는 한국의 생햄은 현재 없는 실정이다.
최근 취재를 위해 지리산에 갔다가 저녁 자리에서 지리산 흑돈 생햄 제조자를 만났다. 남원군 일대 인월, 산내, 운봉, 아영 등 지리산 고지대에는 흑돼지를 키우는 농가가 여럿 있다. 이 흑돼지는 흔히 토종이라 불리는 ‘잡종 버크셔’가 아니다. 외국에서 순종 버크셔를 들여와 지리산 자연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게 개량한 돼지다. 이 흑돼지 산업을 활성화하려는 클러스터 사업단도 조직돼 있다. 지리산 흑돈 삼겹살을 맛본 적이 있어 그 고기 맛은 인정하지만 생햄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한국 생햄을 먹어본 경험으로 이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생햄 제조자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하몽이니 프로슈토니 하는 서양의 것을 좇을 이유가 있느냐. 그들의 것은 이미 세계 명품 반열에 올랐다. 우리 생햄 맛이 웬만큼 괜찮아 판매대에 깔린다 해도 그 옆에는 세계 명품들이 놓일 것이고, 그러면 경쟁이 안 될 것이다. 우리 전통에 생햄 비슷한 제조법이 있다. 납육(臘肉)이라는 것이다. ‘증보산림경제’에 실려 있다.”
스마트폰에서 내 블로그를 뒤져 예전에 정리해뒀던 납육 제조법을 읽어주었다.
“싱싱한 돼지고기를 덩어리째로 말린다(밀 삶은 물에 데친다). 한 근에 소금 한 냥으로 비벼서 항아리에 넣고 2~3일에 한 번씩 뒤집는다….”
다음 날 오후 지리산 흑돈 생햄 제조공장을 방문했다. 돼지 뒷다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진을 대충 찍고 시식을 하는데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먹었던 생햄과는 차원이 달랐다. 짠맛이 적당히 죽어 있고 돼지고기의 고소한 육향이 스멀스멀 올라와 길게 남았다. 투명한 기름의 맛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이탈리아 요리사 박찬일 씨에게 전화를 하고 샘플을 보냈다. 며칠 후 그가 보낸 답장은 ‘산다니엘레보다 맛있고 색도 좋음. 대박 예감’이었다.
한우 고기가 수입 쇠고기보다 맛있는 것은 한우 품종 덕이다. 돼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외국에서 버크셔는 맛있고 귀한 품종의 돼지에 든다. 돼지가 다르니 생햄의 맛도 다른 것이다. 발효 기술이야 ‘증보산림경제’를 기대지 않아도 우리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와 우리 몸에 밴 것일 터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