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해. 아기도 하나를 낳든, 둘을 낳든 딸애 마음이지. 사실 자식 바글바글한 거, 지긋지긋하잖아.”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하루 앞둔 2010년 5월 17일 오전, 서울 인사동 한 전통찻집에 ‘58년 개띠’ 친구들이 모였다. 매일 저녁 인터넷상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다음 카페 ‘58우리들의 은하수’(cafe.daum.net/1958newdogfriends) 회원이다. 오랜만에 봤는데,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정겹다. 이들은 “처음 만나도 친구가 되고,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강하고 독하고 센 게 바로 58년 개띠”라고 말한다.
환한 미소가 유난히 따뜻한 서용욱(52) 대표는 굴지의 대기업에서 20여 년간 근무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무사히’ 넘겼으나, 2004년 ‘자의의 탈을 쓴 타의’로 명예퇴직을 했다. “진짜 어려울 때 믿었던 국가와 사회, 회사가 나를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퇴직금으로 주유소를 차렸지만 결국 비싼 수업료만 치른 채 정리했다. 다행히 지금 운영하는 ㈜한국신용카드결제는 작은 규모지만 제법 내실이 있다. 한 회사에 꽤 오래 다닌 덕분에 앞으로 탈 수 있는 국민연금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에 본인 명의 아파트 한 채, 고향에 아버지 명의 땅이 조금 있어 노후 걱정은 다른 친구들보다 덜한 편. 서씨는 “자식에게 신세질 생각은 전혀 안 한다. 58년 개띠 친구들이 다 그렇다. 그러니 집과 땅은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집과 땅은 자식 주면 안 되지”
전통의상실에서 일하는 이숙화(52) 씨는 세 살 때부터 바느질을 했다. 2남5녀 중 다섯째인 그는 ‘국민학교’만 졸업한 뒤 ‘양장점’에 들어갔다. 자식이 많던 시절, 딸들은 늘 교육에서 뒷전이었다. 예쁜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친구들을 부러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멋쟁이 장발 대학생을 두근두근 훔쳐봤다. 그때는 대학생과 사귄다고 하면 정말 대단해 보였다”고 말했다. 20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결혼했다. 당시엔 여자 나이 25세만 넘어가면 노처녀 취급을 받았다. 두 딸을 낳아 키우던 그는 삶에 여유가 생기자 검정고시로 중·고교를 졸업했다. 지난해 직업 전문학교 의상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올해는 큰딸(28)과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청년 사업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이씨는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게 한”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두 딸은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일까. 두 딸 모두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갔다.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아라.” 그가 늘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한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의 상징적 아이콘인 ‘58년 개띠’라는 말에선 고단한 삶이 물씬 묻어난다. 58년 개띠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의 연속이었다. 1958년 단군 이래 처음으로 신생아 수 80만 명, 일각에서는 13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고 한다(하지만 당시 출생아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남아 있지 않다). 8~9남매의 중간인 이들은 잠시 한눈을 팔면 저녁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한 반에 70명, 3부제로 돌아가는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하며 수많은 급우와 경쟁했다.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58년생인 대통령 아들 박지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가장 찬란해야 할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이들은 유신독재 밑에서 신음했다.
(왼쪽 사진)58년 개띠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 급증한 학생 수를 수용하기엔 학교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한 반에 70명, 3부제는 기본이었다. (가운데 사진)58년 개띠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세대다. (오른쪽 사진)장발 단속을 당하는 젊은이.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학생증을 보여주면 단속을 패스하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민주화 투장에선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경제 성장에선 어느 세대보다 큰 성공을 맛본 게 바로 58년 개띠다. 이들은 20년 넘게 한 회사에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10여 년 고생한 끝에 서울에 아파트 한 채도 마련했다. 365일 중 360일 넘게 일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가장 먼저 잘려나간 것도 이들이다. 믿었던 국가와 사회, 회사에 뒤통수를 맞은 이후 아무도 믿지 않게 됐다. 보험도 들고, 작든 크든 금융과 부동산에 투자하며 스스로 노후를 준비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2010년 52세가 된 이들은 본격적인 은퇴를 앞두고 있다.
광범위한 삶의 궤적
이젠 머리에 서리가 내린 58년 개띠들은 2010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을지 글로벌 김기석(52) 이사는 “숫자가 많고 삶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가든 한두 명씩 만나게 되는 게 바로 58년 개띠”라고 자랑했다.
“‘국졸’과 ‘대졸’이 모두 친구가 되는 유일한 세대가 아닐까요. 고향을 지키며 농사짓는 친구, 장사하는 친구, 부동산으로 재미 본 친구, 대학 나온 후 대기업 다니는 친구, 유학 다녀와 교수 된 친구, 공무원 된 친구, 정치하는 친구, 명퇴 앞두고 귀농 준비 중인 친구, 불황으로 사업 접고 재기를 모색하는 친구 등 아주 다양하죠. 초등학생 늦둥이 아들을 둔 친구도 있지만, 이미 아들을 장가보내 손자까지 본 친구도 있어요. 삶의 궤적이 광범위했던 만큼 지금의 삶도 각양각색이죠.”
보통 58년 개띠를 유신독재 타파에 앞장선 77학번 열혈 대학생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학생 비중은 남자가 30%도 채 안 됐고, 여자는 20%에 그쳤다. 대학생은 소수였으며, 그만큼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대학 정원은 1980년 신군부의 ‘7·30교육개혁’ 이후인 1981학년도부터 점차 늘어났다). 즉 ‘국졸’ ‘중졸’ ‘고졸’ ‘대졸’이 모두 친구였고, 유신에 저항했던 사람과 새마을운동에 열심히 참가했던 사람이 공존하며, 저소득층부터 고소득층까지 넓게 퍼진 세대가 바로 58년 개띠인 것.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삼식 저출산고령사회연구실장(인구학자)은 “인구가 많고 학력 스펙트럼도 무척 넓은 데다, 여러 차례 나타난 개발 호재를 제대로 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나뉘는 등 다양한 이유로 현재의 소득 기반이나 삶의 질이 개인마다 무척 다르다. 은퇴 후 노후 준비 역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런 다양성은 개개인 속에도 존재한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사회학)는 “58년 개띠는 민주에 대한 열망과 보수 성향을 동시에 지녔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장년이 된 지금도 어느 세대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강하지만,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과 근면, 성실한 삶을 통해 이뤄낸 경제적 성취가 이들로 하여금 보수 성향을 띠게 한다는 것.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이런 보수 성향이 바로 아랫세대인 이른바 ‘386’과 자식뻘인 ‘Y세대(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2세를 일컫는 말로, 1979~94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58우리들의 은하수’ 회원인 58년 개띠 친구들. 김기석, 서용욱, 이숙화, 정순득 씨(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어릴 적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술 깰 때까지 저를 앉혀놓고 이런저런 훈계를 하셨어요.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들었죠. 그때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제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더군요. 아이들을 앉혀놓고 꾸짖기 시작했고, 정리정돈을 안 하거나 낭비하고 시끄럽게 떠들면 버럭 화를 냈죠. 어렸을 적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으면서 ‘나 때는 이랬다’는 식의 훈계만 늘어놓았으니…. 이젠 아이들이 다 커버렸는데, 지금도 살갑게 대화를 나누지 못해요. 가슴이 무척 아프죠.”
하지만 자녀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어느 세대보다 크고 깊었던 것도 바로 이들이다. 본인 스스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데 대한 한이 큰 만큼, 자녀의 대학 진학까지 책임지는 게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여기엔 아들과 딸의 차이가 없었다. 58년 개띠가 본격적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시작한 1980년대는 아들 선호사상과 산아제한 정책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다. 당시 가족계획의 표어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였다. 시인인 정순득(52) 씨는 “아이가 한둘밖에 없는 데다 엄마 스스로도 배우지 못한 한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딸 구별 없이 교육을 시켰다”고 말했다.
특히 일에만 몰두하고 가정에선 부재(不在)하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자녀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이화여대 출신인 드라마 칼럼니스트 정석희(51) 씨는 “우리가 ‘극성엄마’의 원조였다”고 털어놓았다.
“대학 때 예쁘고 똑똑한 선배나 친구가 참 많았어요. 그런데 대학 졸업과 동시에 다들 결혼했죠. 직장을 구한다고 해도 교사나 은행원 정도였고, 일반 회사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우리 세대들이 자녀 교육에 좀 더 ‘올인’했던 것 같아요. ‘극성엄마’의 시작이랄까. 잘 자라준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기쁘지만, 조금은 아쉽고 안타깝죠.”
이렇게 자식에게 헌신했지만, 58년 개띠들은 “노후에 자식에게 기댈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개인마다 노후 준비 상황은 다르지만 이 생각만큼은 같았다. 이씨는 “우리는 집도 있고 보험도 들어놓는 등 앞 세대에 비해 영악해졌다. 우리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인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돌성과 노련함까지 갖춘 개
유머강사로 활동하는 전승훈(52) 씨는 “노후를 말하기엔 아직 건강하고,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농사를 지을 줄 알면서 컴퓨터도 사용할 줄 아는, 즉 농경과 산업, 정보시대를 모두 겪은 58년 개띠야말로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 또 이들 상당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평생 한이던 학위를 딸 정도로 열정적이기도 하다.
체력도 젊은이 못지않다는 게 58년 개띠들의 변. 다음 카페 ‘58개띠 마라톤 클럽’ 회원이기도 한 김기석 이사는 “어릴 적 자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고 지금도 등산이나 달리기 등을 꾸준히 하는 우리의 체력이 체격만 큰 요즘 젊은이들보다 좋다”고 말했다.
“자꾸 언론에서는 ‘58년 개띠’ 운운하며 ‘은퇴’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미 빠르면 외환위기 때, 늦어도 2000년대 초반에 한 번씩 업(業)을 바꿨어요. 이후 혹독한 10년을 겪으며 단련했죠. 은퇴하지 않고 평생 ‘현업’으로 살 겁니다. 또 우리는 개띠잖아요. 어떤 상황도 뚫고 나가고,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으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젠 노련함까지 갖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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