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주 36세 회사원
# 지난해에 인터넷쇼핑몰을 창업하느라 대부업체에서 800만 원을 빌렸습니다. 매달 40만 원씩 열 달 동안 갚았는데도 700만 원이나 남았다고 합니다. 카드론으로 빌린 200만 원도 있고요. 1000만 원을 빌려 이를 다 청산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며 매달 150만 원을 받고 있어요.
-부산 거주 29세 여성
‘사람이 은행을 대체할 수 있다.’ 경제 월간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2009 주목해야 할 비즈니스 아이디어’의 하나로 P2P(peer-to-peer)금융을 꼽았을 만큼 P2P금융은 세계적인 뉴 트렌드다. 이는 돈을 빌리는 사람(대출자)과 빌려주는 사람(투자자)이 인터넷에서 만나 거래하는 형태의 금융 서비스. 이미 해외에서는 다양한 목적과 방식을 가진 80여 개 업체가 성업 중이다(48쪽 상자기사 참조).
국내에서도 머니옥션(www.money auction.co.kr)과 팝펀딩(www.pop fuding.com) 두 곳의 P2P금융업체를 통해 사람 대(對) 사람의 금전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해외 업체들과 달리 ‘금융 소외계층을 위한 금융 서비스’로 위상을 다져나가는 점이 특색으로, 대부분의 대출자가 은행에선 돈을 빌릴 수 없는 신용등급 7~10등급의 저신용자다. 팝펀딩 관계자는 “면책, 개인회생, 워크아웃 등 특수기록자가 절반 가까이 된다”며 “이런 특수기록자는 대부업체에서도 대출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들은 서두에 언급한 사례처럼 생활비가 필요하거나, 이율이 높은 대부업체 빚을 갚기 위해 P2P금융업체를 찾는다. 병원비, 사업자금 등 급전(急錢)도 주요한 사유다.
저신용자가 주 고객
인터넷에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방식은 경매와 유사하다. 대출자가 빌릴 금액과 이자율, 사연을 밝히면 투자자가 희망하는 투자금과 이자율을 제시한다. 이 또한 ‘경매’라 부르는데, 투자자 간 경쟁에 따라 낙찰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경매와 달리 건당 낙찰자가 보통 100명을 넘는다. 복수의 투자자가 최소 1000원에서 최대 9만9000원까지 나눠 투자하는 것. 즉, 대출신청 금액이 500만 원이고 200명의 투자자가 모였다면, 1인당 2만5000원씩 빌려주는 셈이다(위의 첫 사례는 1000원에서 6만 원까지 다양한 투자금을 제시한 250명이 넘는 투자자가 모였다).
이런 ‘희귀한’ 금융거래가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국내 P2P금융업체는 성장세에 있다. 2007년 6월 서비스를 개시해 지난해 말까지 누적대출금 55억 원을 기록한 머니옥션은 올 들어 벌써 12억 원이 넘는 실적을 추가했다. 회원 수 3만3000명의 팝펀딩은 올해 목표 회원 수를 20만 명으로 잡았다. 갈수록 신규가입이 급증하는 추세라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본다.
국내 P2P금융업체는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서민들을 잠재고객으로 본다. 좀 더 저렴한 금리로 대출을 성사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 경매를 신청했다고 대출이 모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두 업체의 낙찰률은 7~15% 수준. 자신의 처지와 빌린 돈의 사용처, 상환 계획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대출신청 건은 아예 대출이 성사되지 않는다. 또 활발한 질문과 답변을 통해 투자자들은 자연스럽게 ‘신뢰할 만한 대출자’를 선별해간다. 건당, 그리고 연간 투자금액을 제한해 위험을 분산하도록 한 시스템도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대목이다. 대신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쌓으면 대출받기가 훨씬 쉬워진다. 팝펀딩 관계자는 “1회 이상 상환을 정상적으로 완료한 대출자가 또 대출을 신청하면 하루 만에 낙찰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P2P금융 투자자들은 현재 7500여 명 된다(머니옥션 4000명, 팝펀딩 3500명). 아직까지 ‘얼리어댑터’라 할 이들은 30, 40대 남성 직장인이 주를 이룬다. 머니옥션 관계자는 “은행 예·적금 이자보다 높고, 주식보다 안전한 투자처를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처음엔 10만 원으로 2만 원씩 5건에 투자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가 붙어 3년째 투자하고 있어요. 그동안 450만 원을 투자해 100만 원의 수익을 냈습니다.”
팝펀딩에서 투자하고 있는 대기업 직원 정모(38) 씨의 얘기다. 그는 “정기적금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올려 만족한다”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보람도 무시 못할 동인(動因)”이라고 말했다. 재테크의 일환으로 P2P금융을 시작했지만, 대출자 사연을 접하다가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는 생각에 미치는 것은 대부분의 투자자가 겪는 경험이라고 한다. 정씨는 “그래서 투자자들끼리 ‘P2P 투자는 중독’이란 얘기를 한다”고 전했다.
0.1%에 빌려주겠다…‘기부성’ 투자자도
이러다 보니 딱한 사연의 신청자에게는 이자를 0.1~1%만 제시하는 ‘기부성’ 투자자가 나타난다. 팝펀딩은 이런 기부성 투자를 장려하고자 지난해 12월부터 학자금 후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는 ‘무이자 7년 상환’을 조건으로 학자금을 빌려주는 것. 지금까지 200여 명이 1000원에서 몇만 원의 소액을 십시일반으로 내놔 2명의 대학생이 300만원씩 빌려갔다.
팝펀딩 허진호 대표는 “무엇보다 팝펀딩이 저신용자의 신용 회복에 기여하고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팝펀딩은 2008년 11월부터 제일상호저축은행과 제휴를 맺고 대출자들이 이 은행을 통해 대출받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투자자가 맡긴 예금을 담보로 은행이 대출). 덕분에 대출자들은 제도금융권 거래실적을 쌓음으로써 신용등급을 올릴 수 있게 됐다. 팝펀딩 분석에 따르면 2회 이상 대출을 받은 7~10등급 대출자 105명 중 28명의 신용등급이 상승했다. 허 대표는 “이 28명 중 27명은 최하 신용등급인 9, 10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P2P금융업계가 앞으로 계속 성장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먼저 대부업자 등록이다. 현행법상 남에게 돈을 빌려주려면 대부업자로 등록해야 한다. 그러나 일정 금액 이하면 등록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P2P금융 투자로 9개월 사이에 7000만 원으로 500만 원가량의 수익을 올린 김진원(42) 씨는 “대부업자로 등록하면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할 수 있겠지만, 구청으로부터 여러 관리감독을 받게 돼 번거롭다”고 지적했다. 또 개인투자자에게 원천 징수되는 27.5%의 세율도 투자자들은 “너무 높다”며 불만이다(대부업자는 8%). 이들은 P2P금융이 금융 소외자에게 도움을 주는 사회 기능이 있는 만큼, 세율을 낮춰 더 많은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대부업 등록, 高세율 등이 선결 과제
국내 P2P금융은 ‘지속 가능한 서민금융의 대안’을 꿈꾼다. 머니옥션 측은 “P2P금융을 서민을 위한 사회적 금융 플랫폼으로 이해해달라”고 주문했다. 허 대표는 “무허가·불법업체까지 포함해 80조 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사채시장 이용자가 P2P금융의 잠재고객”이라며 “투자자들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리면 더 많은 서민이 P2P금융으로 금전적 고충을 해결하는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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