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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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세금을 왜 그리스에 퍼주냐

메르켈 獨 총리, 그리스 사태 IMF로 공 넘겨 … 흔들리는 유로존 해체 시발점?

  • 슈투트가르트 = 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10-04-08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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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발 금융위기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요즘 유럽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위기의 진원지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 국명의 이니셜을 따 ‘PIIGS’라고도 부른다. 이들 나라는 재정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적자 규모가 크고 외채가 많다. 최근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은 2009년 이 나라들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낮췄고, 국채의 부도 가능성을 말해주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껑충 뛰었다.

    가장 심각한 나라는 그리스다. 4∼5월에 만기되는 외채만도 250억 유로(38조 원)에 이른다. 이를 막지 못하면 국가 부도사태가 나는 것. 그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사실 그리스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2009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만8650달러로 세계 40위다(한국은 2만1570달러로 49위). 게다가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규모 비율은 유럽연합(EU) 27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이른바 ‘큰 정부’다. 하지만 그 큰 예산도 정부 사업을 감당하기에 벅차, 재정 적자가 지난해 GDP의 12.7%까지 이르렀다. 이는 유로화를 공용 통화로 사용하는 유로존 16개 국가 평균치(6.4%)의 2배이며, 외채 규모도 GDP의 113.4%나 된다. 한마디로 정부가 크게 ‘빚잔치’를 벌였다는 소리다. 그 결과 당장 국민 개개인의 살림살이는 나아졌어도 국가는 무거운 채무를 짊어지게 됐다.

    선심정책 펑펑 그리스 부채 심각

    선심성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연금제도다. 30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후한 수준이다. 임금 대비 연금수령액 비율이 무려 95%로 영국(30%), 독일(37%), 프랑스(50%)보다 훨씬 높다. 연금액 산정의 기준이 되는 근무기간도 다른 EU 국가들은 ‘전체 근무기간’을 적용하지만, 그리스는 ‘퇴직 전 5년’을 기준으로 한다. 이처럼 ‘통 큰’ 연금제도 때문에 그리스의 사회보장비용 지출액은 GDP의 18%에 이른다.

    게다가 공공부문이 전체 경제의 40% 이상을 차지하기에, 비록 정부 예산 규모가 크다 해도 그 돈의 대부분이 공공부문 근로자 임금과 연금·보조금으로 쓰인다. 따라서 재정적 여유는 고사하고 적자만 느는 상황이다. 더욱이 정부가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거시적인 정책, 예컨대 국가 인프라나 미래산업 육성에는 소홀했고, 그 결과 제조업이 취약해졌다. 요컨대 그리스는 사회보장 측면에서 북유럽 국가 수준이지만, 다른 산업구조 및 인프라는 동유럽 국가와 비슷하다.



    한편 탈세가 일상화해, 그리스 감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한 해 탈세액이 무려 310억 유로(약 50조 원)에 이른다. 또 “파켈라키(돈봉투)는 만능열쇠와 같아서 그에 따라 안 될 일도 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포퓰리즘 성향이 강한 역대 그리스 정부는 법인세·소득세 인하 등 선심성 정책을 남발해 국가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보통 적자폭이 커질 때 정부는 금리 인상이나 환율 조정 등으로 대처하지만, 그리스는 유로존 국가라는 족쇄 때문에 그런 수습책도 쓰지 못한다. IMF로 가는 것조차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 통화와 관련된 결정권은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로존 경제재무이사회(ECOFIN)가 쥐고 있기 때문. EU로서는 국제시장에서 유로화 국채 발행을 남발해온 그리스가 ‘눈엣가시’이면서도 연대 책임하에 품고 가야 할 동반자다. 그리스의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 선언은 유로화 금융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켜, 최악의 경우 단일 통화시스템이 붕괴할 수도 있다. 그리스에 대해 ‘도덕적 해이의 극치’라고 비난하면서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유로존 16개국 모두가 골머리를 앓는 이유다.

    2월 11일 긴급 EU 정상회담을 열어 그리스를 도와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지원방안을 놓고는 이견이 있었는데, 관건은 IMF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다수 EU 회원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를 유럽 문제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도 경험했지만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개혁을 요구한다. 유럽에 미국식 경제모델을 강요하는 셈. 이는 자칫 유럽의 결속을 와해시키고 달러 대비 유로화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 유럽에 대한 국제적 신용이 무너지면 유로존 국가 모두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가 유로화를 창설한 만큼 회원국이 낙오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면서 IMF 구제 요청 주장을 일축했다. 심지어 독일 재무장관인 볼프강 쇼이블레도 “그리스의 IMF행은 그냥 방치할 수 없는 국제 정치 차원의 문제”라며 IMF와 유사한 유럽통화기금(EMF) 창설을 주장했다. 유로존 내 문제는 유럽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 그러나 쇼이블레의 이 제안은 메르켈 독일 총리에 의해 일축됐다.

    ‘철의 여인’ 이미지 각인된 메르켈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빚쟁이’ 나라들의 도덕적 해이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뼈를 깎는 자기 개혁과 긴축재정의 노력을 하기 전에는 섣불리 소중한 자국민의 세금을 퍼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배후에는 독일 국민이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60%가 지원에 반대했다. 이런 여론을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독일 라디오에서는 “파산한 그리스여, 너희 섬들을 팔아 빚을 갚으렴”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자주 전파를 탄다. 게다가 5월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선거를 앞둔 메르켈 총리로서는 이런 자국민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가 유럽중앙은행이나 각국에 손을 벌리기 전에 IMF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 스스로도 “EU 정상회담에서 분명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 우리는 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고 배짱을 내밀기는 했지만, 그는 내심 유럽중앙은행에서 저리로 돈을 빌려 4, 5월에 만기되는 외채를 막기 원했다.

    “그리스 문제의 공을 IMF로 넘기자”는 메르켈의 주장에 동조하는 유럽 정상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메르켈 총리를 ‘고집쟁이, 자국 이기주의자’로 봤다. 자존심이 상한 그리스에서는 독일 상품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3월 15일엔 프랑스 재무장관인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독일의 무역수지 흑자를 지목하며 그리스 사태에 대한 연대책임을 주장했다. 독일은 EU 권역 내 무역에서 큰 흑자를 보고 있는데, 이는 여타 유럽 나라가 적자를 감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므로 독일은 이제 자기 나라 살림만 생각하지 말고 유럽 전체의 경기 활성화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사방에서 비난이 일었지만, 메르켈 총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3월 25일 EU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개회 직전 사르코지 대통령과 만나 담판을 지었고 스페인의 사파테로, 룩셈부르크의 융커, 유럽중앙은행의 트리셰 총재를 차례로 설득했다. ‘그리스 파산 직전’이라는 조건 아래 IMF와 유럽의 지원을 병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사실 합의라기보다 메르켈의 제안을 다른 회원국 정상들이 마지못해 승인한 꼴이었다. 눈앞에 닥친 국채 250억 유로의 만기를 채권자들이 연기해주지 않거나, 진짜로 그리스가 섬이라도 팔아 돈을 마련해야 하는 파산 직전 상황이라면 IMF로 가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유로존이 차관 형식으로 자금을 빌려주기로 했다. 조건도 까다롭다. 유로존의 지원을 받으려면 16개 회원국으로부터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금리도 시중보다 낮게 적용할 수 없도록 했다. 추후 과도한 채무를 진 나라는 유로존에서 제명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 문제 해법을 둘러싼 논쟁에서 승리했고, 독일 국민은 “우리의 총리가 유럽을 무릎 꿇게 했다”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하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메르켈 총리에게 ‘철의 여인’ 이미지가 완전히 각인됐다. 원조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984년 유럽 정상회의에서 “내 돈을 돌려달라(I want my money back)”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영국이 내는 EU 회비 중 3분의 2를 매년 돌려받는 이른바 ‘영국 할인’을 관철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영국에 얼마나 금전상 실익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영국은 유럽 나라들의 존경심을 얻지 못해 지금도 EU 언저리에서 겉돌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독일 국민의 피와 땀이 담긴 돈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지켜낸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과 유럽 전체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아직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일로 유럽 내 독일의 이미지가 많이 손상된 것은 분명하다.

    유럽공동체 미래도 불투명

    유로화 및 유럽공동체(EC)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결국 문제 해법에는 도달했지만, 길고도 고통스러운 논의 과정에서 각국의 통화주권이 제한된 공동 통화의 약점이 노출됐다. IMF를 끌어들였는데, 국제 금융시장은 IMF 지원을 유럽의 무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만일 IMF가 구제금융 조건으로 그리스에 제시할 통화정책이 유럽중앙은행과 엇박자를 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리스 말고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과중한 외채는 언제고 또다시 유로존을 침체의 소용돌이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러면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나라가 나올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유로존이 해체될지 모른다. 따라서 영미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유로화가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전망도 나온다. EU 정상들의 그리스 지원에 대한 합의가 나왔을 때, 잠시 반등했던 유로화 환율은 다시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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