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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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가는 의혹 파도… 해군은 울고 싶어라

천안함 사고부터 구조까지 석연찮은 행동으로 사면초가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10-04-07 2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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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가는 의혹 파도… 해군은 울고 싶어라

    3월 30일 인천 백령도 인근 천안함 사고 해역에서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대(UDT) 요원들이 실종자 수색작업을 위해 산소통을 메고 잠수 준비를 하고 있다.

    황해도 장산곶과 인천시 옹진군 백령도 사이엔 인당수가 있다.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바로 그 인당수다. 그만큼 예부터 백령도 앞바다는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백령도 주민들이 “연평도 사람들이 고기 잡으러 왔다가 거센 물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돌아간다”고 전할 정도다. 3월 26일 밤 해군 소속 초계함 천안함(1200t급)이 백령도 서남쪽 해상에서 경비 활동 중 침몰한 사고가 발생하자 백령도는 현재 전시 상황을 방불케 한다. 광양함, 옹진함, 성인봉함은 물론 아시아 최대 수송함인 독도함 등 해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전력이 백령도 인근에 몰려 있는 것. 해군참모 총장이 직접 사고현장을 지휘하는 한편, 3월 30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백령도를 방문했다.

    주민 반, 군인 반이던 섬은 천안함 사고가 터지자 몰려드는 취재진으로 어느새 군인 반, 기자 반이 됐다. 백령도 8대 택시를 비롯해 렌터카는 이미 기자들이 모두 빌렸고, 민박도 만원 상태. 때 아닌 특수인 셈이다. 3월 30일 오전 8시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 4시간 항해 끝에 도착한 백령도는 분주한 구조작업 뒤편으로 어딘가 모를 침묵이 흘렀다. 주민들은 언론과의 접촉에 지친 듯 몸을 숨겼고 그나마 보이는 주민들은 입을 닫아버렸다. 한 마을 주민은 “군에 불리한 발언은 알아서 자제한다. 괜히 인터뷰 잘못했다간 경을 친다”며 “우리는 알아도 모르고 몰라서 모른다”는 말로 지금의 상황을 대신했다. 그럴수록 사고 수습과정에서 벌어진 해군의 석연치 않은 행동에 대한 의문점은 커져만 갔다.

    “마을 사람들이야 오후 9시면 다 잠을 자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나. 육지에 있는 아들한테 전화 와서 사고가 난 줄 알았지.”

    사고 직후 생존자 구조 해군은 어디에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 장촌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밤 11시경 하늘에서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바로 조명탄이었다는 사실을 TV를 보고야 알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장촌리·중화동·두무진 등 사고 해역 주변의 주민들은 사고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고 직후 현장으로 달려간 마을 주민, 해군, 해경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일분일초를 다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사고 직후 아비규환 속에서 104명의 승조원 중 구조된 인원은 58명. 그중 56명을 해경 소속 501함의 고속단정(RIB)이 실어날랐다. 해경은 3월 26일 오후 9시 33분경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해군의 통보를 받았고, 당시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경비업무를 수행하던 501함과 1002함을 사고 해역으로 긴급 출동시켰다. 501함은 전속력으로 달려 사고를 접수한 지 42분 만인 오후 10시 15분경 사고 해역 인근에 도착했다.

    501함이 침몰해가는 천안함에 가까이 가려 하자 해군은 무전교신을 통해 천안함에 접근하지 말고 구조대원들이 탄 고속단정 2척만 보내라고 지시했다. 1002함에도 2척의 고속단정이 있는데 501함에만 고속단정을 요청한 것을 두고 해군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합참 관계자는 “좁은 지역에서 여러 척의 고속단정이 움직이면 전복의 위험성이 크다. 무질서하게 구조 활동을 벌이기보다 안전한 상태에서 구조하자는 당시 지휘관의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나머지 2명을 구한 것은 인천시 소속 어업지도선이다. 어업지도선 214호 문광철(39) 항해사는 “구조작업 지원을 위해 직원 6명이 어업지도선을 타고 오후 10시 5분께 백령도 용기포항을 출발, 10시 30분께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도착 당시 천안함은 옆으로 반쯤 기울어 있었고 엔진이 1개뿐인 어업지도선으로는 접근이 어려워 새벽 3시까지 주변을 맴돌면서 구조작업을 지켜만 봤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커가는 의혹 파도… 해군은 울고 싶어라

    1 해경 경비함정 501함이 천안함 승조원들을 구조할 고속단정을 내리며 구조작업을 준비 중이다. 2 해군 고속정들이 서치라이트를 비추는 가운데 천안함이 함수 끝만 남긴 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3 내복 차림의 한 승조원이 해경의 도움을 받아 501함에 오르고 있다. 4 구조된 승조원들이 고속단정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같은 시각 구조에 동참했던 어업지도선 227호 김정석(56) 선장은 “천안함이 옆으로 쓰러질 때 부상한 승조원을 구조하고, 바다에 떠 있는 구명보트를 가져오기 위해 물속에 들어간 장병을 발견해 어업지도선에 태웠다”고 전했다. 김 선장은 구조한 2명을 용기포항에 내려주고 다시 사고 해역으로 돌아가 27일 새벽까지 거친 파도 속에서 구조작업을 도왔다.

    반면 가장 먼저 사고 해역에 도착한 해군은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다. 해경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사고 현장에는 이미 해군 함정 4척이 있었지만 천안함에 다가가지 못한 채 서치라이트만 비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해군은 “천안함 가까이에 다른 함정을 갖다댈 경우 침몰을 부추길 수 있어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다. 해당 해군 함정은 구조 목적이 아니어서 고무보트를 탑재하지 않아 구조에 나설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실종자 전원이 함미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면서도 사건 초기 함미가 아닌 함수를 찾는 데 주력한 점도 의문이다. 이에 대해 합참 관계자는 “함수가 먼저 발견됐기 때문에 함수 수색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나마 천안함이 완전히 침몰하기 전 승조원이 함수에 부표를 설치했으나 함수가 조류에 떠내려가면서 부표가 끊어져, 함수 위치를 찾는 데만 이틀이라는 피 같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함미도 민간 어선이 발견?

    옹진함은 해저에 음파를 쏘아 반사되는 음파를 영상으로 재구성, 바닥에 숨어 있는 표적까지 확인 가능한 고성능 음파탐지기 소나(SONAR)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함수·함미 수색에 최우선으로 필요했던 함선이다. 하지만 출항 준비에 시간이 걸린 데다, 다른 함정보다 속력이 느린 탓에 사고 이틀 뒤인 3월 28일 오후에야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함미를 찾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백령도의 민간 어선이었다. 해병대 6여단 사령부는 함미 수색작업을 위해 인근 백령도 민간 어선에 도움을 요청했다. 6t급 어선 해덕호 선장 장세광(34) 씨 역시 해병대의 요청에 따라 3월 28일 오후 4시 20분경 어선을 끌고 백령도 인근의 사고 해역을 수색하던 중이었다. 그는 어군탐지기로 수상한 물체를 발견했고 곧바로 수색작업 중이던 해군 참수리정에 무전으로 이 사실을 통보했다.

    침몰한 천안함의 생존자 구조에 이어 함미까지 민간 어선이 발견했다 알려지자 해군의 초기 대응 미흡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천안함이 침몰한 지 사흘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실종자 구조 및 선체 인양작업에 들어가자 실종자 가족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한 실종자 가족은 “해군은 도대체 뭐 하고 있냐? 배 찾다가 사람 다 죽게 생겼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상황이 이러자 해군은 즉각 해명에 나섰다. 해군 관계자는 “천안함의 함미가 (민간 어선의) 어군탐지기에 걸려든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 어선의 제보를 받고 옹진함이 확인한 결과 과거 침몰한 다른 어선이었다”며 “천안함의 함미를 발견한 것은 옹진함”이라고 밝혔다. 다만 어선이 알려준 침몰 선박을 탐지하다 인근에 있던 함미를 발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국방부 김태영 장관 역시 3월 29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어선이 함미로 추정되는 물건을 발견해 도움이 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커가는 의혹 파도… 해군은 울고 싶어라

    천안함 사고로 실종된 장병들을 찾기 위해 수중 작업을 벌이다 순직한 UDT 대원 한주호 준위의 빈소. 빈소를 찾은 고인의 동료가 한 준위의 아들 한상기 중위를 위로하고 있다.

    민간 해상크레인 늑장 출동

    “사고 당일 바로 크레인 출동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장촌리에서 만난 최모(79) 씨는 사고 당일 해상크레인을 동원했다면 지금쯤 함체를 건지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양 작업이 한시가 급한데도 해상크레인의 출동이 왜 지연됐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해군이 출동 요청한 임대전문크레인업체 삼호IND의 2200t급 해상크레인은 사고 발생 이틀 뒤인 3월 28일 경남 거제를 출발했다. 해상크레인은 바지선 3척을 끌고 가야 하는데, 안전성을 고려한 최고 속도가 4노트(약 7.4km/h)에 불과하다. 최고 속도를 내더라도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닷새가량이 걸린다. 도착 이후에도 본격적인 인양작업에 들어가기까지 장비를 설치하는 데 추가 시간이 소요된다. 한편 해군은 국내 최대 규모인 3600t급 해상크레인을 보유한 대우조선해양에 크레인 1기를 추가 요청했지만, 아직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출발 준비를 마친 채 이틀째 대기 중이다.

    합참 관계자는 “지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실종자 구조가 우선이기 때문에 현재는 그쪽에 치중하고 있으며 해상크레인을 사용한 인양 작업은 차후 문제”라고 해명했다. 일각에서는 가라앉은 천안함을 해상크레인으로 끄집어내 실종자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 그는 “실종자 구조와 침몰 함체의 인양 작업은 전혀 다른 일이다. 침몰된 함체를 끌어올리려면 유속의 저항, 침몰된 함체 깊이, 이에 따른 부력 등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실종자 구조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해명에도 김 장관이 “다음 주부터 (함체) 인양을 위한 준비 작업을 하면 선체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실종자 수색과 (함체) 인양을 병행할 수 있으면 하겠다”고 밝히자 시민들은 또 해군이 늑장을 부렸다며 반발했다. 소식을 접한 한 시민은 “함체 인양이 실종자 구조 뒤의 작업이라 해도 미리 요청해놓았다면 향후 작업이 빨라졌을 것이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안도감이라도 줄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성의의 문제”라며 비판했다.

    3월 30일 오후 2시 26분경 취재진 40여 명을 태운 소형 함선이 백령도 용기포구에서 사고 해역으로 출발했다. 광양함에 올라 구조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사고 해역은 1구역(함미 부문)과 2구역(함수 부문)으로 나뉘어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대(UDT) 대원 등 잠수요원들이 실종자 46명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10여 분을 달리자 UDT 대원 40명과 육군특임대 30명 등 총 70명의 구조대원이 함수 부근에서 구조 작업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고무보트에 의지한 예닐곱 명의 구조대원은 2m에 이르는 높은 파도와 빠른 유속으로 구조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물에 들어가면 3~4℃의 낮은 수온과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그리고 빠른 조류 등 3대 악재가 겹쳐 구조가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무리한 구조작업 죽음 불렀다

    배 안에 있었음에도 거센 조류가 느껴졌다. 무언가를 잡고 있지 않으면 갑판에 서 있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날 사고 해역의 유속은 5.3노트. 음력 보름으로, 조수 간만의 차도 가장 커 유속이 평소보다 빨랐다. 3~4노트만 돼도 태풍이 불 때 빌딩 옥상에서 혼자 바람을 맞는 것과 비슷하다. 해군본부 정보공훈실 임명수 소령은 “지금 이 배의 시속이 20~25km인데도 이 정도로 흔들린다. 구조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진행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취재진 역시 빠른 물살 탓에 광양함에 접근하기 어려워 결국 광양함을 우회해 독도함을 지나 다시 용기포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고 해역은 흐린 날씨에 수온마저 뚝 떨어진 상태다. 물 밖에서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있었음에도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수온은 3~4℃로 낮아 물속에 들어가면 체온이 35℃ 이하로 내려가는 저체온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 특히 함미가 가라앉은 곳이 수심 45m에 이르는데도 산소통만 메고 스쿠버로 잠수를 하는 상황이었다. 수심이 40m 이상일 때는 잠수복과 산소연결선에 산소를 주입하는 등 심해 잠수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하지만 심해 잠수장비를 설치하려면 사나흘이 걸리기 때문에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안전 규정까지 어겨가며 구조작업을 벌이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해군은 사고 직후 늑장 대응했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자 구조작업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화를 불렀다. 3월 30일 오후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UDT 소속 한주호(53) 준위가 구조작업 도중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 군은 한 준위의 죽음에도 실종자 구조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수심 작업을 마친 후에는 그 시간의 2배 정도 감압시간을 가지면서 천천히 수면으로 올라와야 한다. 하지만 구조대원들은 하루 3~4회의 구조 활동을 연일 벌이느라 피로가 쌓인 상태로, 추가 사고의 가능성도 높은 것이 현실이다. 한 예비역 UDT 대원은 “구조대원들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급박한 환경임에도 실종자 가족들의 피 말리는 심정과 비판적 여론 탓에 구조 활동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사고 직후 해군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다는 증거가 잇따라 제기되자 해군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적극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사고 원인 규명과 함께 구조과정에서 해군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사고 수습 이후에도 뜨거운 감자가 될 전망이다.

    SSU와 UDT는?

    인명구조 수직 잠수 SSU, 적진침투 수평 잠항 UDT


    순직한 한주호(53) 준위가 몸담고 있던 UDT는 ‘수중파괴대’로 번역되는 ‘Underwater Demolition Team’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본래 이름은 UDT/ EOD/ SEAL이다. 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는 폭발물 처리라는 뜻이고, SEAL(Sea, Air and Land)은 해상, 공중, 육상으로 침투한다는 뜻이니 위험작전을 도맡는 만능 특수부대라고 할 수 있다. 24주간의 지옥훈련을 통과한 지원자로만 구성하는데, 지옥훈련 중에는 132시간(닷새 반) 동안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체조와 구보를 하는 것도 있다.

    1943년 태평양 타라와 섬에서의 상륙전을 준비하던 미 해군은 일본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섬 주변 바닷속에 철조망과 기뢰를 쳐놓았는데, 이것을 제거할 목적으로 UDT를 창설했다. 1950년 8월 5일 애치슨 중위가 이끄는 미 해군 UDT 10명은 여수 해안으로 침투해 터널 안에 숨어 있던 인민군을 공격하고 빠져나왔다. 이것이 6·25전쟁에서 미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다. 한국 해군은 1955년 미 UDT 훈련을 받은 34명으로 UDT를 창설했다.

    천안함 함미부 인양 작업으로 주목을 받은 SSU는 ‘Ship Salvage Unit’의 약어로, 우리말로는 ‘해난구조대’다. 해저에 가라앉은 잠수함이나 수상함에서 생존자를 구해내고, 와이어를 걸어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일을 한다. SSU 대원들은 심해 잠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강한 수압에 신체를 적응할 수 있는 ‘챔버(chamber)’를 갖춘 광양함 같은 구난함(救難艦)과 함께 움직인다. UDT 대원들은 침투가 주 임무여서 수면 밑에서 수평 잠항을 주로 하고, SSU 대원들은 심해로 내려가는 수직 잠수를 주로 하는 전문가들이다. UDT와 SSU는 ‘해군 최강’ 타이틀을 놓고 상당한 경쟁심을 갖고 있다.

    이정훈 동아일보 논설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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