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이레 펴냄/ 395쪽/ 1만2000원
장편소설 ‘귀향’은 슐링크가 쓴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저 없이 손이 갔다.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필자가 언젠가 소개했던 ‘다른 남자’란 소설이 있다.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꼭 읽어보시라. 조금은 어렵고, 너무나도 쓸쓸한 이야기에 진이 빠질 수도 있지만, ‘다른 남자’ 또한 그만의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 소개할 ‘귀향’도 슐링크의 작품답다. 내밀한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사회성이 짙다. 세상의 복잡다단한 아픔을 잘 묘사하고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학술 출판사에서 법률 전문 편집자로 일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여러 ‘귀향 이야기’를 액자소설처럼 다층적으로 변주하면서 역사와 정의, 현대 독일의 과거사, 악의 본성 등에 관한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페터 데바우어. 아버지 없이 홀어미와 독일에 살고 있던 페터는 어린 시절 스위스의 할아버지 댁에서 매년 여름방학을 보낸다.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 총서를 편집하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는 잘못 인쇄된 종이들을 모아 페터에게 연습장으로 쓰라고 주곤 했다.
연습장 뒷면에 쓰인 이야기들 중 페터의 눈에 띈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에게 붙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독일 병사 카를의 귀향 이야기였다. 몇몇 동료와 함께 탈출했으나 혼자만 남게 된 카를은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도착,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아내는 어린 딸을 품에 안은 채 조금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다음의 내용을 연습장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페터는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완성된 작품들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페터는 어느 날 이삿짐 속의 종이꾸러미에서 카를 이야기를 발견한다. 페터는 카를 이야기에 나온 배경이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아 직접 결말을 찾아 나선다.
페터는 자신의 과거이자 시작인 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남긴 회고록을 통해서만 막연히 자신의 아버지와 뿌리에 대해 알고 있던 페터는 기나긴 자아 찾기 여정을 시작한다.
페터는 잃어버린 결말을 찾는 과정에서 카를 이야기의 저자를 발견하고,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직감한다. 페터는 이름을 바꿔 존 드 바우어로 살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존 드 바우어가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페터는 분노와 실망감을 안고 독일로 돌아온다. 돌아온 페터에게 어머니는 카를 이야기의 결말을 알려준다. 카를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귀향은 페터 자신의 뿌리를 뜻한다. 페터가 귀향 이야기의 결말 찾기에 더욱 집착했던 것은 완성되지 못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귀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페터가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수많은 전쟁 이야기와 할아버지의 우울증은 독일의 전쟁 역사와 전후 독일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귀향’ 안의 또 다른 이야기, 카를 이야기에서 귀향 이후 실향민들의 모습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인 전후 세대들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상처를 이야기한다. 카를 이야기의 결말이 분실된 것은 전쟁이 남긴 생명의 손실과 개인적인 기록의 손실을 뜻하며, 작가는 귀향 이야기를 소재로 전후 세대의 자아 찾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페터가 찾아낸 아버지, 존 드 바우어의 모습은 역사의 끔찍한 한 부분을 만들어놓고 무책임하게 도망쳐 과거를 지운 채 살아가는 나치의 모습을 나타낸다. 페터의 고통스러운 자아 찾기는 지우고 싶은 전쟁 이후의 독일 역사를 보여준다.
‘귀향’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다양한 관계의 사랑이다. 페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평범한 사랑과 그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조건에 따른 계약결혼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지조가 없는 여인과의 사랑, 그리고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사랑으로 비극적으로 끝나는 사랑도 등장한다. 슐링크의 다음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