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황제가 된 이후 오늘날까지 정사 혁신에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허약한 것이 고질이 되고, 영락이 극도에 이르러 짧은 시일 안에 회복시킬 대책을 세울 가망이 없게 되었다. 짐이 결연히 반성하고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이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오던 대일본 황제폐하께 넘겨, 밖으로는 동양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는 팔도(八道) 백성을 보전하게 하는 바이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의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해 행복을 받도록 하라.”
1910년 8월22일 오후 5시. 서울 남산의 통감부(統監府)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조선주재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300만명의 조선 백성과 22만km²의 한반도 조선 영토를 일본제국에 양도하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 조인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로써 조일수교조약이 체결된 지 34년 만에,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18년 만에 나라를 잃게 됐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조약 체결 즈음 이미 어전회의에서 조약안을 재가했고, 일본은 조선 민중의 반발을 의식해 언론을 철저히 봉쇄한 뒤 8월29일 공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일본의 치밀함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관찰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청일전쟁(1894~95년)을 통해 종주국 청(淸)의 개입을 차단했고, 고종이 친(親)러시아 정책을 펴려 하자 을미사변(1895년)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문치(文治)’를 이기다
삼국간섭(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의 랴오둥반도 영유를 인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공동간섭에 나선 것) 이후 눈엣가시 같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대한제국의 종말을 알린 전주곡이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68만9000명(전사자 13만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1년8개월여 만에 끝난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보호국으로 완전 지배하는 ‘을사보호조약안’이 만들어졌다. 조선에는 통감부가 설치됐고, 각국 공사는 조선을 떠났다. 외교권 박탈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이어져 결국 ‘저항하던’ 고종은 1907년 7월19일 강제 퇴위하면서 고별사를 한다.
“슬프다. 짐이 열조의 기업을 전수한 지 40여 년 동안 어려움이 많았고, 매사 뜻대로 됨이 없었다. …짐의 마음은 두렵기가 마치 물 위의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이어지는 치밀함의 끝이 바로 경술국치였다.
500년 조선왕조가 국치를 당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이완용과 매국 조연들의 합작품이라는 분석부터 유교(주자학)와 세도정치 망국론, 일본제국주의론이 잇따르지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라고 묻기보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던 에드워드 기번(1737~94년, ‘로마제국의 쇠망사’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대한제국 쇠망사도 여기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준비 안 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빠르게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한 (일본의)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조선의) ‘문치(文治)’를 이긴 것이다. 문치는 무력경쟁을 하면 힘 규합이 늦다. 결속을 못했다는 건데, 그 대가로 일제 36년의 시련을 겪었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근대화한 일본이 왕에 비협조적인 조선의 문벌귀족, 당파, 세도정치의 틈을 파고들었다고 분석한다.
경술국치 당시 한국합병의 담당 실무자였던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는 이 교수의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1910년 7월 서울에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이 고마쓰를 불러 합방에 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러시아와 청국은 전쟁에 패했고, 영국과 미국은 한국에 연고가 깊지 않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단행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찾아왔다. 새로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의 합병에 관한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완용이 이인직을 보낸 것이다.
고마쓰는 “일한일가(日韓一家)를 만들어야 한다”며 합병의 즉시 단행을 강조하면서도 “이완용 총리가 이를 피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생각하고 있다”며 은근히 협박한다. 그는 당시 이인직이 찾아온 일을 회상하면서 “그물을 치기도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무사정신에는 쇼부(勝負) 의식이 있다. 처음엔 일본도 양이(洋夷)를 배격했지만, 힘에서 비교 안 되게 차이가 나니까 휙 돌아섰다. 천황 중심으로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0년간 군선과 상선 100척을 샀다. 우리 (문치) 전통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은 달랐다.”
이 교수는 무사정신은 근대화를 목표로 앞서 나갔고, 문치는 1945년 해방과 65년 한일협정을 거치면서 그 뒤를 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궁극적으로 문치의 방향은 맞았다고 단언한다.
그러고 보면, 해방 이후 한국은 부단히 일본을 쫓았는지도 모른다. 서양의 근대화 문명에 일찍 눈뜬 일본은 늘 한국을 앞서 나갔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펴낸 ‘전후(戰後) 50년사’와 한국 사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첫 고유모델인 ‘포니’를 출시했지만, 일본은 이미 1907년 일본 최초 가솔린 자동차 ‘다쿠리’를 선보였다. 일본 자동차회사 닛산이 1959년 영국의 오스틴 모델을 바탕으로 한 ‘블루버드(BlueBird)’를 출시해 1년에 20만대를 판매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끌자 ‘마이카 시대’가 일본 사회의 주요 화두가 됐고, 1967년에는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한다. 한국은 ‘포니’ ‘르망’ 등 소형차의 선전으로 1990년대 초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1997년에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하면서 자동차를 ‘부의 상징’에서 ‘필수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 소니사가 1960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TV를 내놓자 한국의 금성(LG전자 전신)은 10년 뒤인 1970년 국내에 첫 트랜지스터 TV를 선보인다.
“그물도 치기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
2004년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빈집’이 각각 감독상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52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 ‘삶’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라쇼몽’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베니스영화제에서는 ‘5월의 이야기’로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인은 2004년 한국인이 느낀 자부심을 50년 앞서 만끽했다. 1946년 ‘스무 살의 청춘’에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했는데, 한국에선 8년 뒤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년)에 처음 나왔다.
한국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한 뒤 2005년 들어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반면 일본은 25년이나 앞서(1964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했고, 1990년대에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2000년에는 1782만명이라는 사상 최고 해외여행자 기록을 세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막대한 무역흑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나서서 ‘천만인 프로그램’(10Million program·해외여행자 1000만명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을 진두지휘한 영향이 컸다.
‘올해의 키워드’로 본 한일 사회상 비교도 흥미롭다. 1961년 일본의 ‘올해의 키워드’는 ‘고도성장’. 1960년 이케다(池田) 내각이 ‘국민소득배증계획(國民所得倍增計劃)’을 발표하고 연 10% 이상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실현하면서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산업스파이’와 ‘유통혁명’이 올해의 키워드로 뽑혔고 ‘핵가족’(1967년), ‘정보화 사회’(1969년), ‘삼림욕’(1982년), ‘재테크’(1984년), ‘서포터’(1993년) 등이 뒤를 이었다.
핵가족, 정보화, 삼림욕 … 한국보다 20년 앞선 일본
군사정변 이후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년)의 성공으로 1970~80년대에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국보다 10, 20년 빠른 페이스. 산업스파이와 정보화 사회라는 용어도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핵가족 문제 역시 1980년대 이후 부각된 사회문제임을 감안한다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삼림욕과 재테크 역시 1990년대 중후반부터 언론에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일본이 10여 년 앞섰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 9.91%(2007년 기준)로 일본의 1980년대 초반 수준. 2009년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는 22.7%이다.
한국이 빠르게 따라잡은 분야도 있다. 1970년대 4.28명(일본은 2.07명)이던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최근 1.21명으로 일본(1.27명)을 추월(?)했고, 평균수명도 78.6세로 일본(82.6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은 어떨까. ‘주간동아’는 정치, 경제, 국방, 교육 등 15개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 분석했다. 경술국치 이후 부단히 일본을 쫓은 한국, 과연 일본을 얼마나 따라잡았을까.
1910년 8월22일 오후 5시. 서울 남산의 통감부(統監府)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조선주재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300만명의 조선 백성과 22만km²의 한반도 조선 영토를 일본제국에 양도하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 조인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로써 조일수교조약이 체결된 지 34년 만에,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18년 만에 나라를 잃게 됐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조약 체결 즈음 이미 어전회의에서 조약안을 재가했고, 일본은 조선 민중의 반발을 의식해 언론을 철저히 봉쇄한 뒤 8월29일 공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일본의 치밀함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관찰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청일전쟁(1894~95년)을 통해 종주국 청(淸)의 개입을 차단했고, 고종이 친(親)러시아 정책을 펴려 하자 을미사변(1895년)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문치(文治)’를 이기다
삼국간섭(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의 랴오둥반도 영유를 인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공동간섭에 나선 것) 이후 눈엣가시 같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대한제국의 종말을 알린 전주곡이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68만9000명(전사자 13만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1년8개월여 만에 끝난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보호국으로 완전 지배하는 ‘을사보호조약안’이 만들어졌다. 조선에는 통감부가 설치됐고, 각국 공사는 조선을 떠났다. 외교권 박탈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이어져 결국 ‘저항하던’ 고종은 1907년 7월19일 강제 퇴위하면서 고별사를 한다.
“슬프다. 짐이 열조의 기업을 전수한 지 40여 년 동안 어려움이 많았고, 매사 뜻대로 됨이 없었다. …짐의 마음은 두렵기가 마치 물 위의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이어지는 치밀함의 끝이 바로 경술국치였다.
500년 조선왕조가 국치를 당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이완용과 매국 조연들의 합작품이라는 분석부터 유교(주자학)와 세도정치 망국론, 일본제국주의론이 잇따르지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라고 묻기보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던 에드워드 기번(1737~94년, ‘로마제국의 쇠망사’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대한제국 쇠망사도 여기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준비 안 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빠르게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한 (일본의)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조선의) ‘문치(文治)’를 이긴 것이다. 문치는 무력경쟁을 하면 힘 규합이 늦다. 결속을 못했다는 건데, 그 대가로 일제 36년의 시련을 겪었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근대화한 일본이 왕에 비협조적인 조선의 문벌귀족, 당파, 세도정치의 틈을 파고들었다고 분석한다.
경술국치 당시 한국합병의 담당 실무자였던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는 이 교수의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1910년 7월 서울에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이 고마쓰를 불러 합방에 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러시아와 청국은 전쟁에 패했고, 영국과 미국은 한국에 연고가 깊지 않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단행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찾아왔다. 새로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의 합병에 관한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완용이 이인직을 보낸 것이다.
고마쓰는 “일한일가(日韓一家)를 만들어야 한다”며 합병의 즉시 단행을 강조하면서도 “이완용 총리가 이를 피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생각하고 있다”며 은근히 협박한다. 그는 당시 이인직이 찾아온 일을 회상하면서 “그물을 치기도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무사정신에는 쇼부(勝負) 의식이 있다. 처음엔 일본도 양이(洋夷)를 배격했지만, 힘에서 비교 안 되게 차이가 나니까 휙 돌아섰다. 천황 중심으로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0년간 군선과 상선 100척을 샀다. 우리 (문치) 전통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은 달랐다.”
이 교수는 무사정신은 근대화를 목표로 앞서 나갔고, 문치는 1945년 해방과 65년 한일협정을 거치면서 그 뒤를 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궁극적으로 문치의 방향은 맞았다고 단언한다.
그러고 보면, 해방 이후 한국은 부단히 일본을 쫓았는지도 모른다. 서양의 근대화 문명에 일찍 눈뜬 일본은 늘 한국을 앞서 나갔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펴낸 ‘전후(戰後) 50년사’와 한국 사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첫 고유모델인 ‘포니’를 출시했지만, 일본은 이미 1907년 일본 최초 가솔린 자동차 ‘다쿠리’를 선보였다. 일본 자동차회사 닛산이 1959년 영국의 오스틴 모델을 바탕으로 한 ‘블루버드(BlueBird)’를 출시해 1년에 20만대를 판매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끌자 ‘마이카 시대’가 일본 사회의 주요 화두가 됐고, 1967년에는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한다. 한국은 ‘포니’ ‘르망’ 등 소형차의 선전으로 1990년대 초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1997년에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하면서 자동차를 ‘부의 상징’에서 ‘필수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 소니사가 1960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TV를 내놓자 한국의 금성(LG전자 전신)은 10년 뒤인 1970년 국내에 첫 트랜지스터 TV를 선보인다.
“그물도 치기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
2004년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빈집’이 각각 감독상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52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 ‘삶’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라쇼몽’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베니스영화제에서는 ‘5월의 이야기’로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인은 2004년 한국인이 느낀 자부심을 50년 앞서 만끽했다. 1946년 ‘스무 살의 청춘’에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했는데, 한국에선 8년 뒤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년)에 처음 나왔다.
한국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한 뒤 2005년 들어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반면 일본은 25년이나 앞서(1964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했고, 1990년대에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2000년에는 1782만명이라는 사상 최고 해외여행자 기록을 세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막대한 무역흑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나서서 ‘천만인 프로그램’(10Million program·해외여행자 1000만명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을 진두지휘한 영향이 컸다.
‘올해의 키워드’로 본 한일 사회상 비교도 흥미롭다. 1961년 일본의 ‘올해의 키워드’는 ‘고도성장’. 1960년 이케다(池田) 내각이 ‘국민소득배증계획(國民所得倍增計劃)’을 발표하고 연 10% 이상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실현하면서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산업스파이’와 ‘유통혁명’이 올해의 키워드로 뽑혔고 ‘핵가족’(1967년), ‘정보화 사회’(1969년), ‘삼림욕’(1982년), ‘재테크’(1984년), ‘서포터’(1993년) 등이 뒤를 이었다.
핵가족, 정보화, 삼림욕 … 한국보다 20년 앞선 일본
군사정변 이후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년)의 성공으로 1970~80년대에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국보다 10, 20년 빠른 페이스. 산업스파이와 정보화 사회라는 용어도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핵가족 문제 역시 1980년대 이후 부각된 사회문제임을 감안한다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삼림욕과 재테크 역시 1990년대 중후반부터 언론에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일본이 10여 년 앞섰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 9.91%(2007년 기준)로 일본의 1980년대 초반 수준. 2009년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는 22.7%이다.
한국이 빠르게 따라잡은 분야도 있다. 1970년대 4.28명(일본은 2.07명)이던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최근 1.21명으로 일본(1.27명)을 추월(?)했고, 평균수명도 78.6세로 일본(82.6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은 어떨까. ‘주간동아’는 정치, 경제, 국방, 교육 등 15개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 분석했다. 경술국치 이후 부단히 일본을 쫓은 한국, 과연 일본을 얼마나 따라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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