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의 무서운 상승세를 견인하는 김요한.
지난 시즌 최하위의 불명예를 안았던 남자프로농구 부산 KT(전 KTF)는 현재 15승6패(이하 모든 기록은 12월9일 기준)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이미 지난 시즌 최종 성적(12승42패)을 넘어섰다. 시즌 초반 8연승의 휘파람을 불었던 KT는 11월까지 여러 차례 선두에 올랐다. 1년 만에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수직상승한 것이다.
2007~08 시즌 최하위로 추락한 여자프로배구 현대건설은 5승1패로 순위표 맨 위에 올라 있다. 현대건설은 2005년 이후 1~2위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의 벽을 넘지 못하던 남자프로배구 LIG손해보험(이하 LIG)도 1라운드에 기세 좋게 전승을 거두고, 현재도 9승2패의 성적으로 2위에 랭크돼 있다. LIG가 최근 3시즌 동안 기록한 성적은 4위. KEPCO45와 초청팀 상무가 매년 2할도 못 넘는 승률을 올리는 약체 팀인 점을 감안하면 LIG의 성적은 실질적으로 최하위나 다름없었다.
감독들의 유연한 리더십
최근 몇 년 동안 성적이 좋지 못하던 이 3개 팀이 선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승 청부사’로 불리는 감독과 우수한 외국인 선수의 영입이다.
KT 전창진 감독은 원주 동부 사령탑을 맡아 그 전신인 TG 삼보 때를 포함해 3차례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어냈던 명장이다. 이런 전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 지난해 승률 2할대에 불과하던 팀이 완전히 달라졌다. 올 시즌 KT는 상무에서 복귀한 조성민과 김도수, 새 외국인 선수 제스퍼 존슨 외에는 전력상승 요인이 없음에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전 감독의 독특한 훈련방법과 지도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 감독은 특히 ‘외국인 선수 컨트롤’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감독이다. 현재 득점 2위인 존슨이 11월19일 경기에서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자 “집으로 가라”며 주무에게 비행기 표를 마련케 한 일화는 전 감독의 용병 길들이기의 위력을 엿보게 한다.
그의 강한 카리스마 앞엔 국내 선수들도 바짝 긴장한다. 그러나 전 감독은 경기 중에는 호랑이 같지만, 코트 밖에서는 선수의 여자친구 문제까지 함께 고민하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감독이다. 이렇듯 강약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유연한 리더십이 선수들의 응집력을 높인다는 평가. 최인선 SBS 스포츠 농구해설위원은 “전 감독은 대인관계도 좋고 성품이 초조해하지 않는 데다 통 넓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무보다는 숲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현대건설의 황현주 감독은 2006~07 시즌 흥국생명 감독 시절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을 차지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인물.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인 황 감독이 지휘봉을 잡자 현대건설은 언제 부진했느냐는 듯 올 시즌부터 최강 전력을 구축했다.
용병들의 맹활약 … 토종 경쟁력도 ‘up’
이 3개 팀의 선전(善戰)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도 큰 몫을 차지한다. KT의 존슨은 현재 경기당 21.48점을 기록해 득점 부문 2위를달리고 있다. 특히 막판 4쿼터에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면서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그동안 외국인 선수 복이 없던 KT에게 존슨의 영입은 그야말로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격.
현대건설의 주포 케니는 공격 부문에서 단연 앞선다. 1라운드에서 123점을 올려 2위 밀라(도로공사)를 27점차로 제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라운드에서도 이 부문 선두에 올라 있다. 블로킹에서도 1, 2라운드 모두 2위에 올라 사실상 팀 공격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동안 외국인 선수의 덕을 못 봤던 LIG도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베네수엘라 출신 피라타의 맹활약으로 활짝 웃고 있다. 1, 2라운드에서 각각 득점 부문 3위와 2위에 올랐다. 무엇보다 주포인 김요한과 이루는 하모니가 팀 상승세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다.
박상오를 비롯해 송영진, 조성민, 김도수로 이뤄진 KT의 포워드진은 국내 최강이다. 최인선 위원은 “3점 라인이 넓어진 만큼 포워드의 역할이 중요한데, KT의 포워드들이 훌륭하게 이를 수행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센터 노릇까지 해가며 정통 센터가 없는 팀의 약점을 잘 보완하고 있다. 또한 KT는 조직력이 뛰어나며, 이런 조직력이 바탕이 된 속공 농구는 KT 농구를 특징짓는 부분 중 하나다.
이는 결국 팀 기록으로도 이어진다. 팀 득점 2위(83.6점), 팀 어시스트 2위(18.3개), 3점슛 1위(7.4개)에 올라 있다. KT는 7명의 선수가 평균 득점 7~8점대에 몰려 있는 데서 볼 수 있듯 특정 선수 위주가 아닌, 여러 선수가 골고루 활약하며 ‘벌떼 농구’를 구사하는 팀이 됐다.
LIG에게 가장 고무적인 것은 그동안 팀 선배 이경수의 그늘에 가려 있던 김요한이 1라운드에서 득점(87점·6위), 공격성공률(51.95%· 3위), 후위공격성공률(71.79%·1위) 모두 상위권에 오르며 팀의 전승을 주도했다는 사실. 피라타와도 좌우에서 환상적인 조합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선수 3명을 내주면서 데려온 세터 황동일도 갈수록 안정된 토스워크로 동료들의 공격성공률을 높여주고 있다. 상무에서 복귀한 레프트 임동규도 감초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강력한 센터나 리베로가 없음에도 LIG가 선전하는 이유다.
현대건설의 상승세는 ‘최강 블로커’ 양효진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11월 일본에서 열린 그랜드 챔피언스대회에서 블로킹 부문 1위에 오른 기세를 살려 국내 무대에서도 현재 세트당 0.95개로 블로킹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케니가 잘 때리고, 양효진이 잘 막아주는 형국.
이 3개 팀의 즐거운 반란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일단 KT는 3개월째 상위권에 머무르며, 여러모로 안정된 조직력을 자랑하고 있어 주전 선수 부상 등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지금의 기세를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가 없는 건 아니다. 최인선 위원은 “팀 내 정통센터가 없어 센터인 도널드 리틀의 활용을 극대화해야 하며, 올해 35세인 고참 가드 신기성의 체력 안배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용관 KBS N 스포츠 배구해설위원은 “LIG는 세터가 안정감을 찾고, 현대건설은 경기 흐름에 잘 대비하는 플레이를 선보인다면 지금의 상승세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2007년 최하위, 2008년 6위로 추락했던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는 올해 보란 듯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차지하며 명문 팀의 위상을 되찾았다. 이처럼 하위 팀들의 선전은 언제나 신선하고 팬들의 관람욕구를 자극한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것이 스포츠계의 진리. 그 진리가 올겨울 코트에서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