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의회 총선이 실시된 지난 9월27일에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선거도 치러졌다. 연방 차원에서 사민당(SPD)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득표율(23%)을 기록하며 참패했지만, 브란덴부르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마티아스 플라체크(Matthias Platzeck) 주지사가 이끄는 사민당은 5년 전보다 나은 성적인 33%의 득표율로 1위 정당 자리를 고수, 2위와 3위에 오른 좌익당(Die Linke, 27.2%)과 기민당(CDU, 19.8%) 중 연정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브란덴부르크에서 사민당은 지난 10년간 기민당과 주 정부를 구성했지만, 이번에 플라체크는 향후 5년간의 파트너로 과감하게 좌익당을 선택했다. 이른바 적(赤)-적(赤) 연정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좌익당 뿌리는 舊동독 일당독재 당
이 연정 수립은 의미심장한 정치 포석으로 평가된다. 5년 전에도 좌익당의 전신인 민사당(PDS)이 득표율 28%로 2위를 차지했지만, 1위 사민당(당시 득표율 31.9%)은 3위인 기민련(득표율 19.4%)과 연정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좌익당 그리고 그 전신인 민사당은 오랫동안 독일 정계의 ‘왕따’였다. 보수정당인 기민련, 자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인 사민당조차 좌익당과의 협력 가능성을 극구 부인해왔다. 그런 와중에 적-적 연정이 탄생한 것이다.
사민당은 그간 “좌익당과 손잡느니 보수우파인 기민련과 연합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표명했다. 좌익당의 뿌리가 구 동독을 일당 독재하던 사회주의통일당(SED)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19세기 독일 노동운동의 법통을 잇는 것은 14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민당이다. 1914년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탈당해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조직했고, 이것이 훗날 독일공산당(KPD)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점령지역이던 구 동독에서 사민당은 공산당과 강제로 합당돼 사회주의통일당이 됐다. SED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이름을 민사당으로 바꾸고 스탈린식 공산주의와 결별했지만, 해외로 망명한 구 동독 정권의 상당수 인사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이는 동독 시절의 행적에 대해 사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는데, 유독 사민당은 공산주의 전력을 가진 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한편 서독 지역에서는 사민당이 유일 좌파정당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슈뢰더 총리가 ‘Agenda 2010’이라는 구호 아래 사민당을 중도 노선으로 이끌자, 많은 사람이 그의 노선을 신자유주의 담론에 입각한 ‘제3의 길’로 평가했다. 이에 선명 좌파를 표방하는 오스카 라퐁텐(Oscar Lafontaine)을 따르는 이들이 사민당을 떠나 2005년 1월 ‘대안적 선택 : 노동과 사회정의(WASG)’를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그해 가을 총선에서 민사당과 연합하며 좌익당을 태동시켰다. 그러니 사민당 처지에서 좌익당은 여러모로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데도 브란덴부르크에서 사민당과 좌익당의 적-적 연정이 성립된 이유는 뭘까.
연정 협상 결과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플라체크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일(11월2일)의 ‘슈피겔’지 기고를 통해 연정 이유를 ‘화해’로 꼽았다. 환경운동을 하는 그에게 슈타지(구 동독 비밀경찰)가 찾아와 가족을 들먹이며 위협하던 기억은 아직도 악몽 같지만, 그는 “과거는 흘려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문제인 것은 누구는 가해자, 누구는 피해자로 나누는 이분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편가름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어 진지하게 화해를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성공적인 화해와 국민통합의 사례로 1951년 사민당 당수인 쿠어트 슈마허(Kurt Schumacher)가 히틀러 친위부대 고위장교 두 명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일화를 언급했다. 비록 슈마허 본인은 나치 시대에 거의 10년간 집단수용소에 갇혀 지낸 과거를 지녔으면서도 두 장교, 또 그들이 대변하는 90만명의 나치 친위부대 요원을 품어주는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나 국가적으로 합당했다는 의미에서다. 이어 플라체크는 그간 독일 정계가 SED의 후예인 좌익당을 신(新)나치 대하듯 경원시한 것이 결코 독일 사회와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슴속 트라우마 어떻게 치유하나
플라체크의 글이 발표되자 사방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먼저 그가 예로 든 ‘나치 친위부대의 포용’이란 비유의 적절성이 도마에 올랐다. 좌익당에서조차 자신들을 나치 잔당으로 취급했다고 분개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좌익당에 몸담은 채 주 정부 고위직에 오르려는 구 동독 집권자들을 피해자들이 과연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한편 브란덴부르크 주 정부의 권력을 10년 만에 내려놓게 된 기민련은 “적-적 연정 수립은 순전히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나온 것”인데 “역사적인 화해사건으로 치장한다”고 비난했다. 사실상 구 동독 SED 후예들과 협력하는 것을 반대해온 플라체크가 오늘날 갑자기 ‘화해’를 화두로 들고 나서게 된 이면에는 ‘좌익당의 급속한 세력화’가 있다는 얘기다. 사민당이 구 동독 지역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
처음 등장한 2005년 총선에서 8.7%를 득표해 원내 제4당에 오른 좌익당은 올해 총선에서는 전국적으로 11.1%를 기록했다. 특히 구 동독 지역만 놓고 보면, 28.5%를 얻어 2등인 사민당(17.9%)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요컨대 어정쩡한 중도좌파를 지향하는 사민당은 추락하는 반면,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당은 구 동독 공산당의 후예라는 멍에에도 전국적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계산을 떠나, 과연 적-적 연정 수립이 구 동독 지역에 잔존하는 균열의 치유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연정을 통해 두 정당이 좀더 가까워질지는 몰라도 구 동독 정권을 두려워하던 이들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좌익당 뿌리는 舊동독 일당독재 당
이 연정 수립은 의미심장한 정치 포석으로 평가된다. 5년 전에도 좌익당의 전신인 민사당(PDS)이 득표율 28%로 2위를 차지했지만, 1위 사민당(당시 득표율 31.9%)은 3위인 기민련(득표율 19.4%)과 연정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좌익당 그리고 그 전신인 민사당은 오랫동안 독일 정계의 ‘왕따’였다. 보수정당인 기민련, 자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인 사민당조차 좌익당과의 협력 가능성을 극구 부인해왔다. 그런 와중에 적-적 연정이 탄생한 것이다.
사민당은 그간 “좌익당과 손잡느니 보수우파인 기민련과 연합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표명했다. 좌익당의 뿌리가 구 동독을 일당 독재하던 사회주의통일당(SED)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19세기 독일 노동운동의 법통을 잇는 것은 14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민당이다. 1914년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탈당해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조직했고, 이것이 훗날 독일공산당(KPD)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점령지역이던 구 동독에서 사민당은 공산당과 강제로 합당돼 사회주의통일당이 됐다. SED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이름을 민사당으로 바꾸고 스탈린식 공산주의와 결별했지만, 해외로 망명한 구 동독 정권의 상당수 인사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이는 동독 시절의 행적에 대해 사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는데, 유독 사민당은 공산주의 전력을 가진 이를 받아들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한편 서독 지역에서는 사민당이 유일 좌파정당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슈뢰더 총리가 ‘Agenda 2010’이라는 구호 아래 사민당을 중도 노선으로 이끌자, 많은 사람이 그의 노선을 신자유주의 담론에 입각한 ‘제3의 길’로 평가했다. 이에 선명 좌파를 표방하는 오스카 라퐁텐(Oscar Lafontaine)을 따르는 이들이 사민당을 떠나 2005년 1월 ‘대안적 선택 : 노동과 사회정의(WASG)’를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그해 가을 총선에서 민사당과 연합하며 좌익당을 태동시켰다. 그러니 사민당 처지에서 좌익당은 여러모로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데도 브란덴부르크에서 사민당과 좌익당의 적-적 연정이 성립된 이유는 뭘까.
연정 협상 결과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플라체크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일(11월2일)의 ‘슈피겔’지 기고를 통해 연정 이유를 ‘화해’로 꼽았다. 환경운동을 하는 그에게 슈타지(구 동독 비밀경찰)가 찾아와 가족을 들먹이며 위협하던 기억은 아직도 악몽 같지만, 그는 “과거는 흘려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문제인 것은 누구는 가해자, 누구는 피해자로 나누는 이분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편가름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어 진지하게 화해를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성공적인 화해와 국민통합의 사례로 1951년 사민당 당수인 쿠어트 슈마허(Kurt Schumacher)가 히틀러 친위부대 고위장교 두 명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일화를 언급했다. 비록 슈마허 본인은 나치 시대에 거의 10년간 집단수용소에 갇혀 지낸 과거를 지녔으면서도 두 장교, 또 그들이 대변하는 90만명의 나치 친위부대 요원을 품어주는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나 국가적으로 합당했다는 의미에서다. 이어 플라체크는 그간 독일 정계가 SED의 후예인 좌익당을 신(新)나치 대하듯 경원시한 것이 결코 독일 사회와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슴속 트라우마 어떻게 치유하나
플라체크의 글이 발표되자 사방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먼저 그가 예로 든 ‘나치 친위부대의 포용’이란 비유의 적절성이 도마에 올랐다. 좌익당에서조차 자신들을 나치 잔당으로 취급했다고 분개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좌익당에 몸담은 채 주 정부 고위직에 오르려는 구 동독 집권자들을 피해자들이 과연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한편 브란덴부르크 주 정부의 권력을 10년 만에 내려놓게 된 기민련은 “적-적 연정 수립은 순전히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나온 것”인데 “역사적인 화해사건으로 치장한다”고 비난했다. 사실상 구 동독 SED 후예들과 협력하는 것을 반대해온 플라체크가 오늘날 갑자기 ‘화해’를 화두로 들고 나서게 된 이면에는 ‘좌익당의 급속한 세력화’가 있다는 얘기다. 사민당이 구 동독 지역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
처음 등장한 2005년 총선에서 8.7%를 득표해 원내 제4당에 오른 좌익당은 올해 총선에서는 전국적으로 11.1%를 기록했다. 특히 구 동독 지역만 놓고 보면, 28.5%를 얻어 2등인 사민당(17.9%)을 큰 차이로 따돌렸다. 요컨대 어정쩡한 중도좌파를 지향하는 사민당은 추락하는 반면,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는 좌익당은 구 동독 공산당의 후예라는 멍에에도 전국적으로 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계산을 떠나, 과연 적-적 연정 수립이 구 동독 지역에 잔존하는 균열의 치유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연정을 통해 두 정당이 좀더 가까워질지는 몰라도 구 동독 정권을 두려워하던 이들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