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부결시킨 김영선 정무위원회 위원장(가운데).
김 위원장이 발언대에 선 이유는 금융산업 분리 완화법의 하나인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에 대한 수정안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수정안은 정무위 위원들이 수개월간 논의해 만든 개정안을 수정한 것이라 정무위의 반발을 샀다. 수정안은 개정안에 10%로 돼 있던 산업자본(기업)의 은행 지분소유 한도를 9%로, 20%이던 산업자본의 사모펀드투자회사(PEF) 출자 한도를 18%로 낮췄다. 5월에 임기가 끝나는 여야 지도부가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정치적으로 타결한 결과물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여야 협의안 사상 초유의 부결
발언대에 선 김 위원장은 “민주주의는 거리에서 말할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며 여야 지도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수정안 통과에 암운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그의 연설은 갈수록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는 “정무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4∼5개월간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에 대해 여야 원내대표들이 마지막 공적을 위해 (정치적으로) 야합했다”면서 “이는 의원의 식견과 경험, 의원이 대표하는 지역구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여야 지도부를 통렬히 비판했다.
일부 의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김 위원장은 “상임위 중심주의를 무시한 채 여야 원내 지도부가 정치적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내놓은 타협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면서 “오늘은 여야 원내 지도부의 권력에 개별 의원들이 짓밟히는 폭거의 날”이라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 위원장의 연설이 끝나자 한나라당 의원 상당수가 동요했다. 수정안에 대한 표결은 그날 자정 직전에 열렸다. 결과는 재석 의원 202명 가운데 찬성 92명, 반대 64명, 기권 46명으로 부결. 반대·기권 110표 가운데 한나라당 표가 70표에 달했다. 여당 의원의 한밤중 반란이 성공한 것이다.
집권 여당의 상임위원장이 여야 합의로 상정된 법안을 부결시킨 것은 국회 사상 초유의 일이다. 김 위원장이 내세운 ‘상임위 중심주의, 의회 민주주의 무시’란 논리가 의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게 당 안팎의 평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나라당 지도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수정안에 합의해놓고 이제 와서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느냐”며 민주당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민주당은 “여당 내부의 반란표로 뒤집힌 사안을 갖고 왜 우리 탓을 하느냐”며 반박했다. 이른바 ‘4월 임시국회 황당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 내부에서는 국회 운영방식에 대한 자성론이 들끓고 있다. 먼저 원내대표의 권한이 너무 강력하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개혁성향 초선의원 모임인 ‘민본 21’ 소속 권영진 의원은 “국회법에는 원내대표들이 합의하라는 내용이 없고 협의해 의사일정을 정하도록 돼 있는데도, 사실상 합의제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다른 국회의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형오 국회의장도 동조했다. 김 의장은 “의원의 권한과 상임위의 기능은 헌법에 규정된 것이고, 원내대표의 기능은 국회법 규정”이라며 “(여야 원내대표들이) 상임위의 권한과 기능을 부인하면서 월권하는 것이 정당 정치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론 정치’의 폐해도 지적됐다. 한나라당의 영남권 재선 의원은 “예산 등 당론을 요구하는 사안 외에 법안 하나하나에도 강제적 당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수도권 초선 의원은 “지도부가 정책을 결정하면 소속 의원들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당론 우선주의 관행을 깨고, 의원 개인의 소신에 따른 크로스보팅(자유투표)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운영 개선의 핵심방안으로는 상임위 중심의 운영체제 구축이 꼽힌다.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제로 운영되고 있는 국회의 낡은 관행을 깨고, 상임위를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에게 논의를 맡겨 모든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
자유선진당 권선택 의원은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려면 상임위가 중심이 돼야 하고, 상임위 중심의 운영체제는 원칙과 명분에 의한 타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상임위 중심 운영체제를 확립하려면 각 상임위 의원들의 전문성 강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 권 의원의 견해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도 “국회법도, 한나라당 당헌도 헌법기관인 의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돼 있다”면서 “의원들의 독립성과 상임위 중심의 운영체제를 통해 원내정당화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장 직권상정 대폭 축소되나
구체적인 상임위 활성화 방안도 추진되거나 검토되고 있다. 특히 대화와 타협 중심의 상임위 활성화 방안으로는 ‘법안 조정절차’와 ‘사전 심의절차’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민주당 박상천 의원은 지난 4월 법안 조정절차 도입을 골자로 한 이른바 ‘타협 추구형’ 국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쟁점 법안의 경우 상임위와 본회의에서 각 재적의원 5분의 1 이상이 요구하면 표결에 앞서 ‘법안 조정절차’를 거치자는 것이다. 여야가 선정한 조정위원 간 협상에서는 찬반토론의 시간제한을 없애는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인정하고, 그래도 타협이 안 되면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의결로 조정 절차를 종결한다는 것.
또한 여야는 상임위 법안 심사를 위한 소위원회에 앞서 여야 간에 협의를 하는 사전 심의절차를 도입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강제적 당론에 대한 개선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당이 강제적 당론을 정해 의원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국회법과 정당법에 명시하자는 것이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법안을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상정하는 것은 상임위 중심의 운영체제를 역행한다는 이유에서다. 상임위원장 선거의 경우에는 정당이 상임위원만 배정하고, 각 상임위 의원들이 호선으로 위원장을 선출하자는 방안도 제시됐다.
김 의원의 ‘반란’ 이후 이처럼 상임위 활성화 방안과 대안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은 그만큼 국회 운영에 문제점이 많다는 뜻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당사자가 바로 정치인들이다. 국민보다 당론에 휘둘리고 여야 정치적 타협의 희생양이 돼온 국회가 이번 기회에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