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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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요리집의 추억

  • 입력2009-05-15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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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요리집의 추억
    지극히 흔하고 대중적인 중국집이 ‘청요리집’이라 불리며 고급 레스토랑으로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중국집은 현대적 외식문화 개념을 대중적으로 최초 도입했는데 주 고객층이 일본인이다 보니 가격대가 높고 메뉴며 서비스에 왜색이 적잖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찬으로 단무지를 제공하고 젓가락과 물수건, 고기튀김을 일본어로 부르고, 짬뽕 우동 야끼만두(군만두) 같은 일식 메뉴를 넣은 것이 그 예다. 술을 도꾸리라는 일본식 청주병에 담아 판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해방을 맞으며 주 고객층이 주머니 두둑한 일본인에서 가난한 한국인으로 바뀌고 중국집에도 변화가 일었다. 그전까지의 고급 청요리(청나라 때 도입돼 붙은 명칭)에서 자장면, 탕수육 등 한국인 입맛에 맞는 저가 요리를 주 종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변신은 일단 성공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나름의 안정기를 구가하며 메뉴와 맛도 상당히 한국화했다. 하지만 형식에는 왜색이 남아 서울의 오래된 업소들은 여전히 일식 다다미방 구조라 요리가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나면 손님이 박수를 크게 쳐서 부르기 전까지는 종업원이 들어와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륜 커플이나 아베크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밀회 장소가 되었다. 때로 교복 입은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에게 음주와 흡연의 공간이었다. 저가 메뉴를 시켜놓고 들어앉은 커플의 방에는 종업원들이 기척을 자주 보내서 추가 주문의 압력을 넣기도 했다.

    중국집은 1980년대 도시재개발 바람과 화교 탄압 정책으로 주인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바뀌고 중국집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처럼 허접한 맛의 저가 식당이 됐다. 다꽝, 다마네기, 와리바시 등 일본어나 도꾸리병이며 코끝을 쏘는 빙초산의 냄새는 사라져도 아쉽지 않지만 고소한 라드(돼지지방 정제유지)에서 우러나온 풍성한 맛과 자장 곱빼기 가격을 따로 받지 않던 후한 인심, 주방 쪽을 향해 외치던 중국어 주문 등을 대하기 어렵게 된 것은 꽤나 아쉬운 일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교 중국집으로 을지로의 안동장(1945년 개업, 02-2266-3814)을 꼽지만 안타깝게도 맛이며 분위기에서 옛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kr.blog.yahoo.com/igundown



    Gundown은 높은 조회 수와 신뢰도로 유명한 ‘건다운의 식유기’를 운영하는 ‘깐깐한’ 음식 전문 블로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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