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한국 지사를 설립하려는 실리콘밸리 소재 미국 회사의 한국어 번역사. 여성. 25세. 3년간 유효한 취업비자. 연봉은 회사 내 맨 밑바닥에서 두 번째. 해외 체류 경험? 없음.
2009년. 연간 매출 1억5000달러(약 2065억 원)의 LCD 장비업체 포톤 다이나믹스(Photon Dynamics, Inc.·이하 포톤) 부사장. IR 및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담당 최고위직(Vice President of Investor Relations and Marketing Communication). 듀크대 경영대학원 MBA 취득(2007). 한국 남성의 아내이자 초등학생 두 딸의 엄마. 연봉? 13년 전의 8배.
정소연(38) 씨는 미국 생활 13년 만에 이처럼 화려하고 우아하게 성공했다. 영어를 잘 못해 ‘4000만(40 million)’을 “4에다가 영(0)이 일곱 개”라고 해 동료들을 웃겼던 그는 현재 미국 내 IR업계에서 전무후무한 비영어권 출신 최고위직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내에서 흔히 기업홍보로 번역되는 IR(Investor Relations)은 궁극적으로 회사 주식의 합당한 시장가치를 유지시키는 일이다. 기업 실적을 발표하고, 주식거래 상황을 분석하며, 회사 대변인으로서 투자가와 미디어를 상대한다. 때때로 유상증자, IPO(기업 공개), 인수합병, 위기관리 등의 업무를 지휘한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그간의 미국 경험을 토대로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출근한다’(에디션더블유 펴냄)를 출간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포톤에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무렵, 최고경영자(CEO) 등 임원들 앞에서 15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IR 매니저 자리에 도전장을 내민 대목이다. 꼼꼼한 분석과 열정으로 가득 찬 단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그는 번역사에서 IR 담당 매니저로 전격 변신한다. 그는 2004년 신생 회사 ‘넥스테스트 시스템즈’로 옮겨 IPO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스닥에 상장시키는 등 IR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 2007년 11월, 그는 부사장 직함을 달고 친정과도 같은 포톤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은 해외취업을 꿈꾸는 젊은 독자들에게 호평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아이디 ‘zzzlg’ 독자는 “‘하고 싶다’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로 생각을 바꾸게 한 책”이라고 썼다. 2월5일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회사에선 부사장, 가정에선 두 딸의 엄마입니다. 도대체 책은 언제 쓴 건가요.
“샌프란시스코는 뉴욕과 3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오전 6시30분에 장(場)이 서요. 그래서 오전 6시까지 출근하죠. 바쁠 때는 아예 집에 못 오기도 하지만, 되도록 오후 6시 반에는 퇴근해요. 저녁 밥상을 차리고 딸들 숙제를 봐준 다음, 아이들이 잠든 뒤에 책을 썼어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 정말 힘들죠. 책 쓰는 5개월 동안 뜻 깊고 행복했어요.”
IR 전문가는 회사 대변인 구실을 하며 투자가와 언론을 직접 상대한다. 당연히 비영어권 출신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정씨도 10여 년간 IR 분야에서 일하며 자신과 같은 비영어권 출신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씨는 이러한 점이 “오히려 장점이자 셀링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영어가 서툰 까만 머리의 아시아 여성을 만난 투자가들은 좀처럼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어 장벽’이 컸을 텐데요.
“미국에 건너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전신애 전 미 노동부 차관의 자서전을 읽고 느낀 바가 있었어요. 그분이 미국에서 빛날 수 있었던 건 유창한 영어 말솜씨가 아니라, 문서 속 글의 오류들을 꼼꼼히 잡아냈기 때문이래요. 한국말을 쓴다고 다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잖아요. 미국 토박이처럼 영어 구사가 능란하지 않지만, 논리적 글쓰기를 잘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나만의 장점을 밀고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영어 글쓰기는 어떻게 공부했나요.
“먼저 회사에서 사용되는 문서들을 탐독했어요. 신문, 잡지 등에서 관련 업계 기사를 꼼꼼히 읽었고요. 또 꾸준히 글을 쓰면서 틀렸다는 지적도 여러 번 당해봤어요. 듀크대 MBA 과정에서도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지만 논리적인 리포트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죠.”
정씨의 성공에는 노력, 운, 열정, 전략, 인맥 등이 두루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 기여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자면 열정, 노력, 전략, 운, 인맥 순.
“하지만 미국에선 무엇보다 인맥관리가 중요해요. 열정, 노력, 전략을 지닌 사람은 어디에나 많지만, 인맥이 없다면 널리 인정받을 기회를 얻기 힘들죠. 실제 인맥을 활용해 직장을 구한 사람 중 17%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를 통한 반면, 83%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직장을 소개받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어떻게 인맥을 관리하나요.
“미국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미국 엄마’에게서 배웠어요. 그분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해준 인연으로 모녀 관계까지 맺게 된 포톤 직원이에요.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까 사람 만나는 약속을 앞두면 꼭 두통이 생겨요. 피하고 싶고요. 하지만 미국 엄마의 강요에 이끌려 사람들을 두루 만나면서 점점 영어에 익숙해졌죠.
한번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편이에요. 직장 동료의 집들이 파티 등에 참석해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요. 또 인맥관리 차원에서 한 달에 한 번 MBA 동창생끼리 점심식사를 주최하고 있어요. 제 별명이 MBA 시절부터 ‘팀 맘(Team Mom)’이에요.(웃음)”
-비즈니스 영역에서 성공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결혼생활은 장애인가요.
“아니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미국은 매우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가정이 중시되는 사회예요. 존경받는 여성 리더들은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가정도 훌륭하게 가꾸죠. 이들이 슈퍼우먼이란 뜻은 아니에요. 사회가 가정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사회와 기업 그리고 가정 내의 조력이 이들을 뒷받침하죠. 저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정말 ‘스위트(sweet)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가족 덕에 재충전돼 일할 힘을 얻어요.”
2007년 7월 정씨는 평소 알고 있던 뉴욕 월가의 비즈니스맨에게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5년을 일하면 보너스를 포함해 1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제의와 함께. 그러나 그는 이 달콤한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가족 때문이다.
-월가 진출을 포기한 게 아쉽지는 않나요.
“기회비용을 계산해봤어요. 월가 진출은 높은 연봉을 안겨주는 대신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그게 100만 달러를 선사한다면, 괜찮은 연봉에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은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갖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가족, 친구들과 보낼 시간을 내일, 다음번으로 미루다 보면 어느 날 ‘늦었다’고 후회하는 삶이 될 거예요. ‘I love you like there is no tomorrow.’ 내일은 없는 듯 사랑하자는 것이 제 신조예요.”
-책에서 어학연수 경험이나 MBA 학위보다 중요한 것이 실적, 언어구사 능력, 인맥 등이라고 강조했어요. 실제로 후자 쪽 능력으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인도 종종 보시나요.
“그럼요. 포톤만 해도 한국에서 모셔온 엔지니어들이 꽤 많아요. 이분들은 소위 SKY 학벌도 아니고 영어연수 한번 안 가봤지만 자기 분야에서의 실력이 대단하죠. 이들은 하버드대 졸업생보다 더 귀중한 포톤의 자산이에요.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렇게 미국에 온 한국 가정을 자주 만나게 돼요.”
-하지만 요즘 미국 경기가 사상 최악이라, 해외취업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 듯한데요.
“언론매체를 접해도, 주위를 둘러봐도 미국의 고용시장은 최악이에요. 그러나 미국 기업에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수적으로 질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특히 엔지니어, 간호사, 금융계 및 기업 애널리스트 직종에서 아시아인 비중이 늘고 있어요. 현재의 글로벌 경기 때문에 체념하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꼭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일하는 ‘토종’ 한국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을 느낀다면 어떤 것인가요.
“‘칭찬’과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미국 사람들은 정치나 사회문제보다 개인사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서로 칭찬을 많이 해요. 저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인사말로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눈도 못 마주치고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어요. 그러면 대화가 뚝 끊기죠. ‘그런 근사한 말을 해주시니 오늘 하루가 즐거울 것 같아요. 고마워요’라고 하면 되는 건데…. 상대를 즐겨 칭찬하고, 또 칭찬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했으면 해요.”
현재 포톤은 이스라엘의 동종업계 회사와 합병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 IR 업무의 특성상 합병 후 그의 자리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혹은 권한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남편에게 ‘안정 기피증’이라는 놀림(?)을 받는 그는 이제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합병 후 더 큰 회사로 발돋움하는 포톤에서 더 큰 구실을 해내든지, 아니면 오랜 꿈을 실현할 작정이다. 그의 꿈은 IR 서비스를 국제적으로 제공하는 컨설팅 회사를 차리는 것이다.
“미국에 상장된 한국 회사들이 견실함에 비해 가치가 평가 절하된 경우를 보면 속이 상하거든요. 그간 쌓은 미국 투자가들과의 인맥을 활용해 미국 상장 한국 회사들을 더 잘 알리고 이해시키는 일을 구상하고 있어요.”
-해외취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요.
“제 상황과 똑같은 분은 아마도 없겠죠. 하지만 선배로서, 엄마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하고 싶고 잘하는 일, 곧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며 무조건 성공하는 삶을 꿈꾸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삶을 살라’고요.”
2009년. 연간 매출 1억5000달러(약 2065억 원)의 LCD 장비업체 포톤 다이나믹스(Photon Dynamics, Inc.·이하 포톤) 부사장. IR 및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담당 최고위직(Vice President of Investor Relations and Marketing Communication). 듀크대 경영대학원 MBA 취득(2007). 한국 남성의 아내이자 초등학생 두 딸의 엄마. 연봉? 13년 전의 8배.
정소연(38) 씨는 미국 생활 13년 만에 이처럼 화려하고 우아하게 성공했다. 영어를 잘 못해 ‘4000만(40 million)’을 “4에다가 영(0)이 일곱 개”라고 해 동료들을 웃겼던 그는 현재 미국 내 IR업계에서 전무후무한 비영어권 출신 최고위직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국내에서 흔히 기업홍보로 번역되는 IR(Investor Relations)은 궁극적으로 회사 주식의 합당한 시장가치를 유지시키는 일이다. 기업 실적을 발표하고, 주식거래 상황을 분석하며, 회사 대변인으로서 투자가와 미디어를 상대한다. 때때로 유상증자, IPO(기업 공개), 인수합병, 위기관리 등의 업무를 지휘한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그간의 미국 경험을 토대로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출근한다’(에디션더블유 펴냄)를 출간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포톤에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무렵, 최고경영자(CEO) 등 임원들 앞에서 15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IR 매니저 자리에 도전장을 내민 대목이다. 꼼꼼한 분석과 열정으로 가득 찬 단 한 번의 프레젠테이션으로 그는 번역사에서 IR 담당 매니저로 전격 변신한다. 그는 2004년 신생 회사 ‘넥스테스트 시스템즈’로 옮겨 IPO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스닥에 상장시키는 등 IR 전문가로 입지를 굳혔다. 2007년 11월, 그는 부사장 직함을 달고 친정과도 같은 포톤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은 해외취업을 꿈꾸는 젊은 독자들에게 호평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아이디 ‘zzzlg’ 독자는 “‘하고 싶다’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로 생각을 바꾸게 한 책”이라고 썼다. 2월5일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다.
-회사에선 부사장, 가정에선 두 딸의 엄마입니다. 도대체 책은 언제 쓴 건가요.
“샌프란시스코는 뉴욕과 3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오전 6시30분에 장(場)이 서요. 그래서 오전 6시까지 출근하죠. 바쁠 때는 아예 집에 못 오기도 하지만, 되도록 오후 6시 반에는 퇴근해요. 저녁 밥상을 차리고 딸들 숙제를 봐준 다음, 아이들이 잠든 뒤에 책을 썼어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 정말 힘들죠. 책 쓰는 5개월 동안 뜻 깊고 행복했어요.”
IR 전문가는 회사 대변인 구실을 하며 투자가와 언론을 직접 상대한다. 당연히 비영어권 출신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정씨도 10여 년간 IR 분야에서 일하며 자신과 같은 비영어권 출신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정씨는 이러한 점이 “오히려 장점이자 셀링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영어가 서툰 까만 머리의 아시아 여성을 만난 투자가들은 좀처럼 그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어 장벽’이 컸을 텐데요.
“미국에 건너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전신애 전 미 노동부 차관의 자서전을 읽고 느낀 바가 있었어요. 그분이 미국에서 빛날 수 있었던 건 유창한 영어 말솜씨가 아니라, 문서 속 글의 오류들을 꼼꼼히 잡아냈기 때문이래요. 한국말을 쓴다고 다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잖아요. 미국 토박이처럼 영어 구사가 능란하지 않지만, 논리적 글쓰기를 잘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나만의 장점을 밀고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영어 글쓰기는 어떻게 공부했나요.
“먼저 회사에서 사용되는 문서들을 탐독했어요. 신문, 잡지 등에서 관련 업계 기사를 꼼꼼히 읽었고요. 또 꾸준히 글을 쓰면서 틀렸다는 지적도 여러 번 당해봤어요. 듀크대 MBA 과정에서도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지만 논리적인 리포트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죠.”
정씨의 성공에는 노력, 운, 열정, 전략, 인맥 등이 두루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 기여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자면 열정, 노력, 전략, 운, 인맥 순.
“하지만 미국에선 무엇보다 인맥관리가 중요해요. 열정, 노력, 전략을 지닌 사람은 어디에나 많지만, 인맥이 없다면 널리 인정받을 기회를 얻기 힘들죠. 실제 인맥을 활용해 직장을 구한 사람 중 17%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를 통한 반면, 83%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직장을 소개받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2008년 5월 포톤 임원들과 함께 나스닥 폐장 종을 울리는 행사에 참석한 정소연(맨 왼쪽) 부사장.
“미국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미국 엄마’에게서 배웠어요. 그분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해준 인연으로 모녀 관계까지 맺게 된 포톤 직원이에요.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까 사람 만나는 약속을 앞두면 꼭 두통이 생겨요. 피하고 싶고요. 하지만 미국 엄마의 강요에 이끌려 사람들을 두루 만나면서 점점 영어에 익숙해졌죠.
한번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편이에요. 직장 동료의 집들이 파티 등에 참석해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요. 또 인맥관리 차원에서 한 달에 한 번 MBA 동창생끼리 점심식사를 주최하고 있어요. 제 별명이 MBA 시절부터 ‘팀 맘(Team Mom)’이에요.(웃음)”
-비즈니스 영역에서 성공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결혼생활은 장애인가요.
“아니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미국은 매우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가정이 중시되는 사회예요. 존경받는 여성 리더들은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가정도 훌륭하게 가꾸죠. 이들이 슈퍼우먼이란 뜻은 아니에요. 사회가 가정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사회와 기업 그리고 가정 내의 조력이 이들을 뒷받침하죠. 저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정말 ‘스위트(sweet)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가족 덕에 재충전돼 일할 힘을 얻어요.”
2007년 7월 정씨는 평소 알고 있던 뉴욕 월가의 비즈니스맨에게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5년을 일하면 보너스를 포함해 1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제의와 함께. 그러나 그는 이 달콤한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가족 때문이다.
-월가 진출을 포기한 게 아쉽지는 않나요.
“기회비용을 계산해봤어요. 월가 진출은 높은 연봉을 안겨주는 대신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그게 100만 달러를 선사한다면, 괜찮은 연봉에 가족과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은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갖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가족, 친구들과 보낼 시간을 내일, 다음번으로 미루다 보면 어느 날 ‘늦었다’고 후회하는 삶이 될 거예요. ‘I love you like there is no tomorrow.’ 내일은 없는 듯 사랑하자는 것이 제 신조예요.”
-책에서 어학연수 경험이나 MBA 학위보다 중요한 것이 실적, 언어구사 능력, 인맥 등이라고 강조했어요. 실제로 후자 쪽 능력으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인도 종종 보시나요.
“그럼요. 포톤만 해도 한국에서 모셔온 엔지니어들이 꽤 많아요. 이분들은 소위 SKY 학벌도 아니고 영어연수 한번 안 가봤지만 자기 분야에서의 실력이 대단하죠. 이들은 하버드대 졸업생보다 더 귀중한 포톤의 자산이에요.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렇게 미국에 온 한국 가정을 자주 만나게 돼요.”
-하지만 요즘 미국 경기가 사상 최악이라, 해외취업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 듯한데요.
“언론매체를 접해도, 주위를 둘러봐도 미국의 고용시장은 최악이에요. 그러나 미국 기업에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수적으로 질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특히 엔지니어, 간호사, 금융계 및 기업 애널리스트 직종에서 아시아인 비중이 늘고 있어요. 현재의 글로벌 경기 때문에 체념하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꼭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일하는 ‘토종’ 한국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을 느낀다면 어떤 것인가요.
“‘칭찬’과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미국 사람들은 정치나 사회문제보다 개인사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서로 칭찬을 많이 해요. 저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인사말로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눈도 못 마주치고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어요. 그러면 대화가 뚝 끊기죠. ‘그런 근사한 말을 해주시니 오늘 하루가 즐거울 것 같아요. 고마워요’라고 하면 되는 건데…. 상대를 즐겨 칭찬하고, 또 칭찬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했으면 해요.”
현재 포톤은 이스라엘의 동종업계 회사와 합병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 IR 업무의 특성상 합병 후 그의 자리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혹은 권한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남편에게 ‘안정 기피증’이라는 놀림(?)을 받는 그는 이제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합병 후 더 큰 회사로 발돋움하는 포톤에서 더 큰 구실을 해내든지, 아니면 오랜 꿈을 실현할 작정이다. 그의 꿈은 IR 서비스를 국제적으로 제공하는 컨설팅 회사를 차리는 것이다.
“미국에 상장된 한국 회사들이 견실함에 비해 가치가 평가 절하된 경우를 보면 속이 상하거든요. 그간 쌓은 미국 투자가들과의 인맥을 활용해 미국 상장 한국 회사들을 더 잘 알리고 이해시키는 일을 구상하고 있어요.”
-해외취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요.
“제 상황과 똑같은 분은 아마도 없겠죠. 하지만 선배로서, 엄마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하고 싶고 잘하는 일, 곧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며 무조건 성공하는 삶을 꿈꾸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삶을 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