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대학자들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도 예외가 아니다. 집에서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직장에서 ‘인정받기’는 직장인들의 주된 관심사다. 특히 신입사원을 비롯한 사회 초년생들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바늘구멍 같은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도 직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 조직에서 필요한 인물로 인정받느냐는 취업 성공과는 또 다른 문제다.
조직에 필요한 인물 되기 총력전
‘살아남기’는 경기 한파를 실감하고 있는 직장인 모두의 화두다. 당연히 인정투쟁의 강한 동기로 작용한다. 직장인 노지혜(28·여) 씨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조직에서는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일 자체가 윤활유와도 같다. 회사 업무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면서 “언제 조직 내의 부적격자로 찍혀 퇴출순위에 오를지 모를 일이기에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정투쟁이 경력 쌓기의 첫걸음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신입사원 원모(26·여) 씨는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소위 ‘스펙’이 좋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력해 인정받지 않으면 곧 도태된다”면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연봉이 오르고 인센티브도 많이 받아 훗날 다른 직장으로 옮길 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LG텔레콤 신입사원 김성태(28) 씨는 회식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 음주가무로 분위기를 주도한다. 회식 다음 날 선배들을 위해 꿀물이나 비타민 음료를 챙겨가는 것은 기본. 점심시간에는 속 푸는 데 좋은 차를 끓여 내놓기도 한다. 그저 선배들의 비위만 잘 맞추는 것은 아니다. 김씨는 업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6주간의 인턴 과정을 거쳐 취업에 성공한 김씨는 주어진 프로젝트를 밤을 새워가며 완수해 선배들에게 인정받았다. 김씨는 “업무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성 면에서 인정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사 하나는 누구보다 잘하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안면을 터간 것이 선배들에게 인정받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비법’을 공개했다.
중소 해운회사 신입사원 한경훈(30) 씨는 수첩에 자신의 임무를 빽빽하게 적어놓았다. ‘퇴근시간 연장해서 일하기’ ‘가습기의 물 갈기’ ‘프린터에 A4 용지 채우기’ 같은 잔일에서부터 솔선수범, ‘대화할 때는 절대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천천히 들으면서 제스처 취하기’ 등
A to Z가 모두 담겨 있다. 한씨는 직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배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선배들 역시 신입사원의 업무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고차원적 ‘인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LG텔레콤 NAS팀이 회의를 하고 있다.
신입사원들의 인정투쟁에 대한 선배들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LG텔레콤 NAS팀 홍의돈 팀장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몸으로 부딪쳐 인정받으려는 과감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며 “그 연장선에서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일과, 조직이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일을 잘 조화시킨다면 ‘인정투쟁’은 조직에 플러스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평가했다. 7년차 직장인 이준호(34) 씨도 “선배 처지에서는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후배들이 예쁘게 보일 수밖에 없다”며 “불성실하고 딴 생각으로 가득 찬 후배들은 업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선배들이 처리해야 할 임무가 그만큼 늘어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정투쟁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연차가 크지 않은 선후배 간 경쟁이 심해져 팀워크가 흐트러지기도 한다. 신입사원이라면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야단을 맞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한 차례의 실수도 하지 않고 단번에 인정받으려는 신입사원들의 태도가 선배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4년차 직장인 이찬희(28) 씨는 “신입사원들이 잘 보이려고 선배들에게 너무 맞추다 보면 ‘약았다’ ‘줏대 없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또한 자기가 다 안다는 이유로 선배들을 제쳐놓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앞서나가면 신입사원다운 면이 안 느껴진다. 선배들은 가르치는 재미를 기대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우리투자증권 인사부 이성진 차장은 “어떤 조직도 신입사원에게 단기간에 성과물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조직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조직의 활력소 구실”이라며 “장기적으로 역량을 축적해나가려 하지 않고, 빨리 인정받으려는 욕심만 지나쳐서 오히려 업무를 그르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서두르다 보면 선배들과 충돌하거나 빨리 지치기 쉬우므로
2, 3년간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나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과거와 달리 업무 면에서 조직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가 인정을 받기 위한 주된 평가 요소로 작용한다.
인간성보다 업무능력이 평가 기준
인정투쟁의 양상은 과거와 달라졌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인정받기 위한 신입사원들의 첫걸음은 술자리 같은 비공식적인 자리에 얼마나 잘 참석하는가, 커피 심부름이나 복사 같은 궂은 잡일을 얼마나 솔선해서 하는가였다. 하지만 요즘은 조직의 분위기에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고, 업무 면에서 선배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느냐가 인정투쟁의 주된 평가지표가 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인정투쟁이 조직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신입사원과 선배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신입사원은 경력 개발을 인정투쟁의 강한 동기로 삼는 만큼, 자기계발을 통해 역량을 쌓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재전략연구원 신원동 원장은 “요즘 직장 상사들은 신입사원들이 허드렛일을 자청하거나 뭐든 몸으로 때우려는 식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을 으뜸으로 치지 않는다. 궂은일에 솔선수범하는 것은 물론, 플러스알파로 창의성과 도전성도 갖춰야 높게 평가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배들도 그저 ‘잘한다’ ‘수고했다’는 저차원적인 인정에서 벗어나 신입사원의 업무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차원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꾸민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신입사원들의 힘겨운 인정투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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