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위).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한 장면(아래).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더욱 끔찍한 현실을 보여준다. 아프리카산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내전 과정에서 총을 들고 전투에 나서는 소년병들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어야 한다.
장시간 노동이나 소년병으로 내몰려야 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과보호와 풍요로 비만을 걱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한국의 아이들이 또 다른 노역장, 또 다른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숨 건 소년병 이야기 다룬 ‘블러드 다이아몬드’
19세기 영국에서 아동들의 장시간 노동을 막기 위해 도입한 것은 의무교육제였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냄으로써 공장 노동으로부터 보호한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들은 지금 공장에서의 노동 대신 학교에서의 ‘학습 노동’이라는 짐에 짓눌려 있다. 지난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등학생이 남긴 유서는 그 악몽 같은 현실에 대한 탄원이다.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얼마 전 초등학교 아이들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시험을 보는 사진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친구들을 갈라놓는 벽을 사이에 두고 문제를 푸는 어린이들의 모습, 그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또한 너무도 기이해서 초현실적이라고 할 만한 풍경이었다. 그 칸막이는 자신과 친구들을 격리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가두는 감옥의 철창이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우리 아이들은 공부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또 더욱 치열한 경쟁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흔히 핀란드의 교육모델을 얘기한다. 세계에서 교육 경쟁력 1위라고 하는 핀란드의 교육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핀란드의 교육에서는 한국에서 쓰는 의미와 같은 경쟁은 찾기 힘들다. 경쟁이 있다면 친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일 뿐이다. 핀란드의 예에서 진실로 배워야 할 것은 모든 아이의 재능이 다 소중하다는 교훈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그 사회의 모든 가용자원의 개발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발전 전략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 개봉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우리 사회에 학력 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E다. 20년이 지났지만 그 반성은 여전히, 아니 더욱 절실한 상황이 돼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교이지, 19세기 런던의 공장과 같은 학습 노역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