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 넘치는 신입사원이 허황된 꿈을 좇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내심 부족, 조직적응력 부재 등 개인적 사유도 있었지만 단연 1위는 30%가 선택한 ‘적성과 다른 업무 배정’이었다. 즉 인사부서에서 막무가내로 배정한 부서에 불만을 품고, 혹은 가까운 미래에 다른 부서로 이동할 희망이 없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은 회사들은 이를 해소할 방안을 강구했을 터. 간단하게는 일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원하는 부서로 전환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우선 우수한 사람을 원하는 부서에 옮겨주려 해도 뺏는 부서나 빼앗기는 부서 모두 불만을 털어놓기 일쑤다. 옮기지 못하는 직원들의 불만도 커진다. 무엇보다 전환배치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인재(人才)의 퇴사를 지켜보는 방법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관행에 반기를 든 회사가 있다. 독창적인 마케팅과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로 널리 알려진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이하 현대캐피탈)이다. 현대캐피탈은 파랑새족을 줄이고 직원들의 장기적인 능력 계발을 위해 획기적인 제도를 선보였다. 바로 ‘커리어마켓(Career Market)’이다. 한마디로 사내에 인력시장을 만든 것이다.
본인을 매물로 내놓으면 부서장들이 원하는 인재 선택
“능력 있는 사람은 적은데 수요는 많으니,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 거죠. 인사부서에서도 절충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해왔어요. 그래서 아예 시장개념을 도입해 인력시장을 만들어놓으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직과 직원의 니즈(needs)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거지요.”(현대캐피탈 이윤석 홍보실장)
지난해 7월, 현대캐피탈의 혁신을 이끌어온 정태영(48) 사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커리어마켓’은 시행한 지 10개월 만에 다양한 효과를 낳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인력을 필요로 한 부서에서 사내 공지를 통해 인력을 수급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직원 개개인이 나서 사내 ‘채용시장’에 본인을 ‘매물’로 내놓는 시스템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파격적이다.
현대캐피탈이 온라인상에 구축한 인력시장은 ‘오픈커리어 존(Open Career Zone)’과 ‘잡포스팅 존(Job Posting Zone)’으로 양분된다. 오픈커리어 존은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은 직원들이 자신을 등록하고 ‘마케팅’하는 공간이다. 각 부서장들이 이곳을 들여다보며 필요한 인재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반대로 잡포스팅 존은 각 부서가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고 공모하는 곳이다. 한 부서에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선(先)전출, 후(後)충원’의 원칙이 적용돼, 옮기겠다고 손든 직원은 부서장이 막아설 수 없게끔 제도화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지난해 7월 말 제도 시행 이후 8월 말까지 25명이 넘는 직원이 이 제도를 이용해 부서를 옮겼다. 새롭게 옮긴 부서도 다양했으며, 직급도 일반사원에서부터 차장급까지 다채로웠다. 불과 한 달 만에 그동안 밀실구조로 진행되던 ‘그들만의 인사(人事)’가 직원 개인의 판단과 희망에 따른 ‘능동적 행위’로 돌변한 것이다. 2008년 3월 말 기준으로 ‘커리어마켓’을 통해 부서를 옮긴 현대캐피탈 직원은 무려 131명. 전체 인사이동의 80%를 넘는 비율이다.
지난해 12월 이 제도를 통해 주택금융기획팀에서 홍보팀으로 옮긴 김현정(29) 사원은 “이동하고 싶었던 부서에 지원했다가 탈락할 경우 이 사실이 기존 부서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 무척 신경 쓰였다”며 “그러나 보안이 철저한 것에 한 번 놀랐고, 팀 이동이 확정됐을 때 실·본부장을 비롯한 기존 부서원 모두 커리어마켓을 통한 인사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에 두 번 놀랐다”고 말한다.
현대캐피탈 영업기획 부서에서 핵심인력으로 근무하던 모 과장은 평소 재무관련 업무에 대한 희망으로 CFA(공인재무분석사) 자격증을 취득해놓고 있었다. 꾸준한 자기계발을 통한 전문지식 획득은 결과적으로 커리어마켓 제도를 통해 보상받았다. 그는 지난해 말 재무부서로 이동해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었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지 않고도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제도 도입 초기 일선 부서장들의 고민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인력이 특정 부서로 몰리면 조직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시장원리가 적용된 인사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될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앞섰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기우(杞憂)로 드러났다. 상당수 직원들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
오히려 회사 조직이 역동적으로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사례가 잇따라 확인됐다. 커리어마켓 시행 후 여가를 이용해 학원을 다니거나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하는 직원들이 급격히 늘었다. 타 부서로의 전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서 내 우수 인력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많아졌다. 또한 직원들의 경력계발 욕구나 만족도 등을 알아보기 위한 임원과 부서원 간 커뮤니케이션도 활발해졌다.
대학생들이 꼽은 ‘가고 싶은 회사’ 상위권 올라
일선 직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보안’ 문제였다. 다른 팀에서 인력이 필요하다는 공지를 보고 지원했거나 본인 스스로를 ‘오픈커리어 존’에 내놓을 경우 기존 부서에 그 사실이 알려져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이에 버팀목이 된 것은 지난 5년간 ‘열린 기업문화’를 추구해온 회사 경영진과 이를 뒷받침한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었다. 정 사장은 제도 시행 전 직접 마이크를 들고 전 임직원에게 이 제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직원들의 걱정을 불식했다.
“여러분은 ‘직업 선택의 자유’에 입각해 우리 회사를 선택하셨지만, 막상 입사 후에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해왔습니다. 커리어마켓은 직원 여러분께 직무 선택권을 드리기 위한 제도입니다. 위대한 기업은 광고 한 편 잘 만든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혁신적 조직문화와 선진 인사제도에서 온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시작했습니다.”(정태영 사장)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시 간부들이 현대캐피탈을 방문해 정 사장의 특별 강연을 들었다. 현대캐피탈의 브랜드 전략과 그 속에 숨겨진 과학, 그리고 혁신적인 조직문화와 윤리경영까지 2시간여에 걸친 강연이 끝난 뒤 서울시가 가장 먼저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은 것이 커리어마켓이었다. 이른바 6급 이하 서울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헤드헌팅 및 드래프트제’가 그것이다.
현대캐피탈은 자산 20조원, 취급액만 46조원에 이르는 국내 대표적인 소비자 금융회사다. 2003년 신용위기 당시 약 9000억원의 적자를 보던 경상이익은 현재 7000억원대로 성장했다. 특히 2001년 신용카드업에 진출한 현대카드의 성장은 그야말로 드라마와도 같다. 시장점유율 1.8%의 초라한 외형으로 시작한 카드사업은 6년 만에 카드업계 1, 2위 자리를 다툴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대학생들이 꼽은 ‘가고 싶은 회사’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물론, 2010년에는 순익 1조원 클럽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 같은 성장의 배경으로 직원들은 한결같이 ‘투명경영’과 ‘자율적인 기업문화’를 꼽는다. 최근에는 이 두 가지 경영철학의 결정체가 ‘커리어마켓’이라는 자랑이 하나 추가됐다.
“직원들에게 자신을 계발할 최대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믿습니다.”
정 사장이 최근 ‘직원들께 드리는 보고서’ 를 통해 강조한 이 표현은 현대캐피탈이 꿈꾸는 기업문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커리어마켓의 수혜자들
최현희(36)<br>_PRIVIA마케팅팀 과장<br>_전 소속 : 소비자보호센터<br>“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10년차 회사생활을 뒤흔들었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로운 일을 통해 열정을 되찾게 돼 뿌듯하다.”
장국주(35)<br>_경영분석팀 대리<br>-전 소속 : 법인1팀<br>“조직 내에서 개인의 능력과 경력을 계발하는 데 큰 자극이 된다. 이러한 개인의 발전이 모이다 보면 어느새 회사도 훌쩍 자랄 것 같다.”
김현정(29)<br>_ 홍보팀 사원<br>_ 전 소속 : 주택금융기획팀<br>“마케팅과 홍보에 관련된 일을 찾던 중 사내에서도 이직이 가능하다는 얘길 듣고 기쁜 마음으로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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