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30년경 엑제키아스가 만든 항아리의 그림. 아킬레우스가 아마존 여왕 펜테실레이아의 목에 창을 겨누고 있다.
18대 총선이 끝났다. 아직도 여진이 만만치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총선은 전쟁이었다. 몇 개 정당이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언론은 수시로 전황을 보도했다. ‘어느 한 후보가 선전하고 있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아슬아슬 ‘반집 승부’ 지역은 ‘격전지’라며 유권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은 전쟁의 아버지다. 트로이전쟁을 알면 모든 전쟁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전쟁에는 어김없이 ‘트로이 DNA’가 들어 있다. ‘트로이 스토리’가 담겨 있다.
모든 선거 속에는 ‘트로이 줄기세포’가 있다. 영웅들의 용호상박이 있고 계략, 음모, 합종연횡이 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며, 전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안팎으로 출렁인다. 적이 때론 아군 같고, 아군이 때론 적 같다. 말도 안 되는 일들로 치명상을 입는가 하면, 엉뚱한 사건으로 대승을 거두기도 한다. 전쟁은 한마디로 모순덩어리다. 선거도 그렇다.
18대 총선은 그리스(강남) 연합군 vs 트로이(강북) 연합군의 대결
아폴론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연합군은 9년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승부를 내지 못한다. 그러다 한순간 그리스가 절대적인 수세에 몰린다. 그리스 연합군의 대들보 아킬레우스가 갑자기 전투에서 발을 뺐기 때문이다.
그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리품을 챙기는 데 급급하자 ‘뚜껑’이 열린다. 그래서 그는 막사에 틀어박힌 채 나올 생각을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로 철군할 준비까지 서두른다. 이번 총선 기간에 한나라당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이른바 자기 계파 사람들이 공천심사에서 대거 탈락하자 격분한다.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며 성명을 발표한다. 그는 비록 탈당하진 않았지만 선거 기간 대부분을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에서만 머물며 무언의 시위를 계속했다.
불화는 트로이 연합군에도 있었다. 그들은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각자 알아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총선에서 트로이 격이던 민주당도 ‘따로국밥’이었다. 열린우리당파, 구민주당파, 손학규파…. 계파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 전열을 한곳으로 모으기는 애초 불가능했다.
싸움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개인전. 거물끼리의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다. 총선에서 정몽준 대 정동영, 박진 대 손학규, 이재오 대 문국현, 이방호 대 강기갑, 홍정욱 대 노회찬, 신지호 대 김근태의 맞대결은 불구경보다 재미있었다.
트로이전쟁에선 메넬라오스와 파리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디오메데스와 글라우코스, 안틸로코스와 멤논, 아이아스와 헥토르, 디오메데스와 아이네이아스가 맞붙었다.
영웅들의 싸움에서 승자는 아군의 사기를 진작하고 적의 기선을 제압하는 데는 그만이다. 하지만 패자는 두 번 죽는다. 아군을 수세에 몰리게 할 뿐 아니라 책임까지 뒤집어쓰게 한다.
총선 거물 후보들이 싸움에 뛰어드는 과정도 트로이전쟁의 장수들을 닮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전투에 뛰어들진 않았다. 한동안 심사숙고하며 망설였다. 하지만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재빨리 싸움에 뛰어들어 온 힘을 다 쏟았다. 영웅서사시 속 영웅들도 선뜻 모험에 나서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은 부름을 거절했다. 역시 스타는 한두 번 튕겨야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트로이전쟁이 발발하자 오디세우스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 했다. 아킬레우스도 바다의 여신이자 어머니인 테티스의 주선으로 리코메데스 왕궁에 들어가 여장을 한 채 공주들 틈에 숨어 살았다. 두 영웅은 결국 속임수가 들통 났고, 마지못해 참전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고안해 트로이를 몰락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아킬레우스는 그 이름만 들어도 트로이 병사들이 벌벌 떨 만큼 수많은 무공을 떨친다. 트로이 최고의 장수 헥토르도 아킬레우스와의 일전을 앞두곤 잠시 머뭇거린다. 가족, 특히 아내 안드로마케가 아킬레우스의 도전에 응하지 말고 성에 남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 그는 지는 게임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연하게 성 밖으로 나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아킬레우스
이름도 어색한 친박연대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아킬레우스와의 불화로 전세가 기울자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화술의 달인 오디세우스를 많은 선물과 함께 아킬레우스에게 보내 화해를 청한다. 아킬레우스는 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고민하던 아가멤논은 이번엔 아킬레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면 갑옷이라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는 ‘꾀돌이’ 오디세우스가 파트로클로스에게 시킨 계략이다.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나타나자, 그리스 연합군의 최후방어선 앞까지 밀고 온 트로이 연합군은 그를 아킬레우스인 줄 알고 달아난다. 친박연대라는 이름은 바로 아킬레우스의 갑옷이다.
MB-이상득은 아가멤논 형제, 이재오는 방랑 나선 오디세우스, 강재섭은 ‘승리 밀알’ 프로테실라오스, 이회창은 ‘최고령 장군’ 네스토르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총사령관은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었다. 그는 트로이전쟁에 가장 많은 100척의 함선과 병사를 내놨다. 스파르타의 왕이자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도 60척의 함선을 보탰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납치해간 동생의 아내 헬레네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는 그리스뿐 아니라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싶은 야욕에 불탔다. 그는 동생이 찾아와 트로이에 대한 복수를 부탁하자 동생을 나무라며 속내를 드러낸다. 진작 트로이를 짓뭉개버리자고 했을 때 왜 말을 듣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아가멤논 형제는 이명박(MB)-상득 형제를 연상시킨다. 트로이전쟁에서나 이번 총선에서 두 형제는 용감했다.
아가멤논은 자신과 스타일이 비슷한 오디세우스를 중용했다. 트로이전쟁 중에 오디세우스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아가멤논의 특사로 파견돼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자신의 꾀만 믿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미움을 샀고, 결국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나 더 바다 위를 방랑한다.
이번 총선의 오디세우스는 단연 이재오 전 의원이다. 그는 MB의 후광을 업고 총선을 총지휘했지만 낙마하고 말았다. 그는 오디세우스의 10년 방랑 기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는 방랑 기간에 지하세계까지 다녀오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트로이전쟁에는 아이아스가 두 명 등장한다. 로크리스 출신의 소(小)아이아스와 살라미스 출신의 대(大)아이아스가 그들이다. 대아이아스는 홀연 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업고 나올 만큼 용감했다. 하지만 그는 전사한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을 놓고 벌어진 오디세우스와의 경합에서 소외되고 만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 내내 아가멤논이 못마땅했다. 그는 무조건 밀어붙이는 아가멤논에게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했다. 그가 싸우는 것은 결코 아가멤논을 위해서도, 그리스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승리의 기쁨과 명예가 좋아서였다. 그는 무소불위의 추진력을 갖고 살아가는 자유인일 뿐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아킬레우스는 누구일까? 바로 남경필 의원이다. 그의 눈초리와 다부진 몸을 보면 영화 ‘트로이’ 속 아킬레우스가 생각난다. 그는 한나라당 내 소장파의 리더다. 젊은 나이지만 4선을 거머쥐었다. 그는 아킬레우스답게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MB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아테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누구를 닮았을까? 그리스 연합군에는 네스토르라는 최고령의 장군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아가멤논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충고를 해주는 현명한 노인으로 등장한다. 사실 이 총재는 정치 전면에 나서기보다 네스토르 같은 구실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박재승은 프리아모스, 정동영은 헥토르 손학규는 멤논, 유시민은 파리스
통합민주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었던 박재승 씨는 트로이의 인자한 왕 프리아모스와 비슷하다. 그가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소신대로 갔더라면 선거 결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트로이의 헥토르 구실을 담당했다. 그는 대선과 총선에서 트로이의 왕자이자 최고의 영웅 헥토르처럼 선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학규 통합민주당 공동대표도 당내에서 이방인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 대표까지 올랐지만 한나라당의 대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에티오피아에서 트로이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멤논 왕과 같다. 손 공동대표도 민심을 얻기 위해 국토 대장정을 벌이지 않았던가. 멤논 왕은 수많은 그리스의 적장들을 죽이지만 결국 기세등등한 그리스 연합군의 벽을 넘지 못한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민주당의 파리스다. 파리스는 트로이전쟁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다. 그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적자(嫡子), 통합민주당 총선 패인의 불씨로 보는 것은 무리일까?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달아난다. 유 전 장관도 대구에서 출마했지만 허무하게 무너졌다. 달아난 건 아니지만 노무현의 적자로선 미미했다.
트로이가 계속 위기에 몰리자 아마존족의 여왕 펜테실레이아가 달려온다. 아마존족은 여성들만 사는 종족으로, 활을 쏘는 데 방해가 된다며 한쪽 유방을 절제했던 전설적인 여전사들이다. 트로이의 아마존 여전사는 누구일까? 추미애 씨나 강금실 씨가 아닐까?
트로이전쟁에서 흥미로운 점은 신들도 그리스 측과 트로이 측으로 갈라져 싸웠다는 것이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심판한 아프로디테와 그의 정부 아레스, 그리고 트로이성을 쌓은 아폴론은 트로이 편이었다. 아프로디테와의 ‘미스 여신대회’에서 패배한 아테나, 헤라, 그리고 포세이돈은 그리스 편이었다.
데메테르
전직 대통령들은 대부분 신의 캐릭터를 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격정적인 포세이돈을 닮았다.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친박연대를 두둔하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폴론 유형이다. 아들이 국회의원으로 나섰지만 이성의 신 아폴론답게 냉정을 잃지 않고 ‘침묵의 소리’로 의사를 표현했다. 그의 아내 이희호 여사는 지독한 모성을 지닌 데메테르 여신을 닮았다.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자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의무도 팽개친 채 딸을 찾아나선다. 이 여사는 무리하게 국회의원에 출마한 아들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지원유세를 아끼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천부적인 싸움꾼 아레스를 닮았다. 낙향해서도 내내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의 후광이 적진에서 귀한 한 석을 일궈냈다곤 하지만, 그 한 석이 잃은 민심 55석을 대신할 수 있을까?
박근혜는 아테나, 이방호는 소(小)아이아스?
대통령의 딸이라서 그런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여신 아테나를 닮았다. 아테나는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제우스가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사랑하는 동안 신탁이 내려진다. 그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를 신들의 제왕 자리에서 밀어낸다는 것이었다. 제우스는 깜짝 놀라 메티스를 조그맣게 만들어 삼켜버린다. 그 후 열 달이 지나자 제우스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제우스는 아들이자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치라고 명령한다. 헤파이스토스가 시키는 대로 하자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무장’한 성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게 바로 아테나다.
아테나는 어머니를 모른다. 그는 철저히 아버지의 딸로 살아간다. 박 전 대표는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아버지를 보좌하며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다. 아폴론을 비롯한 다른 자식들은 가끔 아버지 제우스에게 대들기도 했지만, 아테나는 늘 순종하며 그를 보필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에 종속됐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현실을 인정하고 남자 신들과 대등하게 대결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갔을 뿐이다. 전쟁의 신이기도 한 그는 함부로 무기를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독립성이나 자존을 해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보복을 가한다. 그는 메두사가 자신의 신전을 더럽히자 메두사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실뱀으로, 얼굴은 보는 사람을 돌로 만들 만큼 흉측하게 만들어버렸다. 또 트로이전쟁 중에 교만하고 호전적인 소아이아스가 자신의 신전을 모욕하자 귀향하던 그를 죽음에 빠뜨린다.
이방호 전 사무총장은 혹시 ‘얼음공주’ 박 전 대표의 모습으로 하강한 아테나 여신 때문에 낙마하고 만 소아이아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