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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HSBC은행의 여성직원 선후배들이 서울 중구 서울지점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승은 인턴사원, 이성은 이사, 조혜용 본부장, 이윤서 이사(왼쪽부터).
아하, 그제야 무릎을 쳤다. 보통의 회사들과 달리 HSBC는 업무에 큰 지장이 없는 한 ‘눈치 보지 않고’ 주중에도 휴가를 낼 수 있는 직장이다. 일하는 엄마, 그것도 큰 시중은행에 다니는 엄마가 평일 낮에 열리는 자녀 입학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기업, HSBC는 그런 곳이다.
일반인에게 ‘다이렉트 뱅킹’으로 익숙한 HSBC는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전 세계 83개국에 진출한, 총 자산규모가 2조3540억 달러(2007년 12월 말 기준)에 달하는 글로벌 금융그룹 중 하나다. HSBC는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인 1897년 인천 제물포에 사무소를 열면서 한국에 첫 진출했다.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82년 부산 지점을 개설하면서부터. 현재는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경기 지역 등에서 11개 지점과 5개 기업금융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전체 직원은 1300여 명, 총 자산규모는 17조9038억원(2007년 12월 말 기준)이다.
외국계 은행이라는 점 말고 한국HSBC은행이 다른 시중은행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여성 임원이 유독 많다는 것이다. 사이먼 쿠퍼 행장 아래 모두 10명의 최고경영진(부행장급)이 포진해 있는데, 이중 4명이 여성이다. 이들 여성 최고경영진은 업무 총괄, 인사, 마케팅, 홍보 등의 분야를 진두지휘하고 있다(52쪽 사진 참조). 한국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평균 4% 미만이라는 점, 국내 시중은행에서 여성 행장이나 부행장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한국HSBC은행은 이사 이상 직급에서도 여성 비율이 42%에 이른다.
채용 과정서부터 결혼 유무로 인한 차별도 없어
이처럼 한국HSBC은행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한 것은 HSBC그룹이 다양성(diversity)을 중요 가치로 여기는 점과 깊게 연관돼 있다. HSBC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를 채용하고 개인의 성별, 인종, 신체적 조건, 나이,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직원들이 좀더 역동적으로 일하고 잠재능력을 발휘하도록 독려하는 것을 중요한 기업 철학으로 여긴다. 이러한 다양성 존중 철학이 바탕에 깔린 HSBC에는 한국 기업의 ‘고질병’인 성별에 따른 차등이 발붙일 틈이 없다.
1993년 입사한 인재개발센터 이지영 본부장은 “HSBC에 근무한 15년 동안 한 번도 여성 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장 비서로 근무하던 그가 행장으로부터 다른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볼 것을 권유받은 시점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그는 임신 6개월 때 홍보 부서로 발령받아 홍콩 등으로 해외출장도 다녔다. 이 본부장은 “직원 채용면접 때 어느 여성 지원자에게 ‘곧 결혼할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봤다가 나중에 상사에게 크게 혼났다”며 “HSBC는 채용 과정에서도 결혼 유무로 차별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달가량 장기휴가도 OK … 일과 가정의 조화 버팀목 구실
앞서 얘기했듯 HSBC에는 휴가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기업문화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대부분의 직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일수를 모두 사용한다. 연차 휴가의 절반은 반드시 연속적으로 써야 하는 코어 리브(Core Leave)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활용된다. 덕분에 대다수 직원들이 매년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가량 장기휴가를 떠난다. 이러한 휴가문화는 여성 직원들에게 일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도록 하는 버팀목이 돼준다. 업무지원부 이성은 이사는 “제사나 집안 행사, 학부모 모임 등이 있을 때마다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며 “다들 사전에 업무 조율을 잘 해놓고 당당하게 휴가를 쓰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기혼인 여성 직원들은 자녀들의 방학 때 코어 리브 휴가를 내 자녀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이처럼 휴가 사용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업무대체(Backup) 시스템이 잘 갖춰진 덕분이다. 휴가자의 업무는 남은 직원들이 나눠서 맡는다. 이때 휴가자의 업무가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상사도 부하직원의 일을 대신 맡는다. HSBC는 이러한 업무대체 시스템이 직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의 기회를 줄 뿐 아니라, 부서원 전체가 업무를 공유하게 함으로써 인력 공백에 따른 업무 누수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본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서 한국HSBC은행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은행은 2007년 1월 전 세계 HSBC그룹 내 최초로 여성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런데 여성위원회가 발족하게 된 ‘문제의식’이 흥미롭다. 보통의 한국 기업이나 국내 시중은행보다 여성 임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음에도 ‘여성 임원이 적다’는 판단에서 여성위원회가 설립됐기 때문이다.
한국HSBC은행의 전 직원 1300여 명 중 여성의 비율은 64%로 반수가 훌쩍 넘는다. 그러나 이사 이상 직급에서는 여성의 비중이 43%로 반수 이하로 떨어진다. 이처럼 여성 직원이 남성 직원보다 임원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데 여성으로서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하에 한국HSBC은행은 여성 직원들의 성장을 지원하고자 여성위원회 설립을 추진했다.
여직원 성장 지원 위해 여성위원회 설립
여성위원회는 △은행 내 다양성 추구 △여성 직원들의 경력개발 지원 △여성 직원들의 커뮤니케이션 창구 확립 및 여성 네트워크 구축 △다양한 사회공헌 및 봉사활동을 통한 은행 이미지 제고 등을 설립 목적으로 삼는다. 여성 선배와 후배들을 이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반응이 매우 좋다고 한다.
멘토와 멘티는 직장생활의 고충, 커리어 관리뿐 아니라 살림이나 육아 문제까지 조언을 주고받는다. 지난해 9월에는 마가렛 룽 HSBC그룹 글로벌 기업금융 공동대표를 초대해 일과 가정생활의 조화, 커리어 및 자기관리법에 대한 강연도 열었다. 3월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그린 HSBC그룹 회장도 여성위원회의 활약을 접하고는 전 세계 HSBC에 이를 전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같은 여성위원회의 활동은 조금씩 HSBC 여성 직원들의 변화와 의욕을 이끌어내고 있다. 기업자금관리부 이종실 본부장은 “마가렛 룽 대표도 남편과 아이들을 홍콩에 두고 호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나 스스로도 여성이라서 안 된다며 한계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며 “홍콩 근무를 받아들이고 남편과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5월에 떠난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해 멘토링 프로그램에서 멘티로 참여했던 홍보부 정임현 이사의 경험담이다.
“작년에 고등학생을 둔 학부모가 되면서 내가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멘토에게 털어놓았다가 ‘이제 자녀도 다 키웠으니 오히려 지금부터 더욱 열심히 일에 매진할 때’라는 충고를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에는 상무, 본부장, 부대표 자리에 있는 여성 선배들이 많다. 이사인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한나 과장은 이틀 후 기자가 요청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내주었다. 하루 늦게 자료를 받았다고 해서 기자가 겪은 불편은 없었다. 한국HSBC은행에서 직장인으로서의 의무와 엄마의 역할을 조화롭게 해내는 여성 직원이 비단 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먼 쿠퍼 행장도 “우리 여성 직원들은 매우 의욕적으로 일할 뿐 아니라, 일과 가정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고 평가했다. 남성 직원인 한동률 과장(개인금융부)은 “HSBC 여성 직원들은 여성이라서 우대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만약 아내가 HSBC 직원이라면 그것은 남편에게도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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