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에 두 명의 중년 남성이 들어섰다. 건장한 덩치는 물론 얼굴형과 머리카락색, 그리고 일그러진 귀까지 꼭 닮았다.
“닮았어요? 전생에 형제였나 봐요.(웃음) 오늘도 짜고 입은 것처럼 옷도 비슷하게 골라 입었더라고요.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이 친구랑은.”
한 사람은 88 서울올림픽 당시 레슬링에서 우리에게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김영남(48·사진 왼쪽) 씨,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당시 김씨에게 역전패해 은메달에 그쳤던 카자흐스탄(당시 구소련)의 파올렛(46) 씨다.
현재 김씨는 파올렛 씨의 나라인 카자흐스탄에서 건설업체 ‘천산개발’과 자원개발업체 ‘카즈너지’ 등을 거느린 성공한 기업인이다. 흥미로운 점은 김씨에게 카자흐스탄에서의 사업을 권유하고 도와준 사람이 다름 아닌 파울렛 씨라는 것. 확실히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잘나가던 모든 것 포기 새로운 도전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중 첫 번째로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을, 다음으로는 카자흐스탄에 간 것을 꼽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간 것은 파올렛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올림픽의 궁극적인 의미는 스포츠로 평화와 우정을 나누자는 것이지, 감정을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물론 경기에서 졌을 땐 서운했지만, 그것이 우정을 맺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습니다.”(파올렛)
두 사람은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2, 3년 전 국제경기에서 처음 만났고,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까워졌다. 당시 시상식에서 김씨는 패자인 파올렛 씨의 손을 들어올려 위로했는데, 파올렛 씨는 김씨의 그런 배려가 가슴 깊이 남았다고.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둘은 국제경기에서 자주 만났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에요. ‘영남, 프리즈 텔미, 빨리빨리.’(웃음) 사랑하면 다 통한다고 하잖아요.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마디 말과 손짓만 주고받아도 다 통하거든요.”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이후 파올렛 씨는 카자흐스탄 체육계의 거물로 성장했다(얼마 전까지 카자흐스탄 관광체육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여러 개의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파올렛 씨는 김씨를 만날 때마다 카자흐스탄에서 사업을 하라고 권유했고, 이는 김씨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씨는 1997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갔다. 외환위기 때였지만 국가대표팀과 삼성생명 레슬링팀 코치를 겸임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김씨가 모든 걸 포기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만류했다.
“용단이었죠. 함평에 계신 부모님은 잘나가는 아들이 왜 이름도 낯선 땅에 가려는지 이해하지 못하셔서 눈물로 말리셨어요. 하지만 뭔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용단을 내려야 했고, 지금도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봅니다.”
원래 김씨는 교수가 되고 싶어 카자흐스탄으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국가대표 코치로 안한봉 심권호 선수 등이 금메달을 따는 데 도움을 주면서 지도자로서의 실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능력만으로는 부족한’ 학계 풍토나 당시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무엇보다 “더 이상 이뤄낼 게 없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는 아내에게 ‘목표중독증’이라는 핀잔을 들을 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좇는 타입이다.
“농고에 다니다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늦깎이로 레슬링을 시작했어요. 레슬링을 하다 보니 국가대표라는 목표가 생겼고, 이후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가 생겼죠.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는 지도자로서 금메달을 만들어냈고요. 하지만 레슬링 같은 비인기 종목은 ‘그 이후’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뭐든 미쳐서 도전했는데,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전하고 불안했어요. 목표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잖아요.”
목표를 찾아간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는 가장 먼저 외환위기로 인해 국내에 재고로 쌓인 국산 자동차를 가져다 카자흐스탄에 파는 무역업을 했다. 반응이 좋아 쉽게 수십억원 가까운 돈을 벌었지만, 곧 이어 다른 사업에 투자해 실패를 거듭하면서 모두 잃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사업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 3년은 흔들렸어요. 동물의 왕국에서 저는 초식동물이었죠. 하지만 10년을 보고 갔기 때문에 크게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레슬링을 시작하고 10년 만에 금메달을 땄거든요.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10년을 미쳐서 매달린다면 못해낼 게 없다고 자신합니다.”
10년 만에 사업에서 금메달 획득
이후 김씨는 부동산 개발업과 건설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이 2000년 이후 연간 10% 이상 성장을 거듭하면서 불어닥친 부동산 붐을 타고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본인은 재산을 밝히기 거부했지만 김씨는 현재 1000억원 가까이 자산을 일군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말한 10년 계획이 이뤄진 셈이다.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라는 점은 카자흐스탄에서도 큰 도움이 돼요. 전직 대통령이 레슬링 선수였을 정도로 레슬링의 인기가 높고, 무엇보다 금메달리스트라는 점에서 저에게 신뢰를 보이거든요.”
김씨와 파올렛 씨는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레슬링 체육관을 종종 찾아가 현지 선수들을 지도하며 몸을 푼다. 한때 링에서 맞수였던 두 사람은 현재 카자흐스탄 자원개발이나 건설 등 몇몇 분야에서 동업을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이 처음부터 “고향처럼 친근했다”는 김씨처럼 파올렛 씨 역시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가 관광체육부 장관으로 재임할 당시 카자흐스탄 여자대표팀 사령탑에 한국인 코치가 임명된 것이나, 태권도와 양궁대표팀이 한국인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앞으로 둘만의 우정을 넘어 두 나라가 친선을 쌓는 데 가교 구실을 하길 희망했다.
“이 친구와 저의 목표는 둘이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최고 기업을 일구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국과 카자흐스탄 두 나라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닮았어요? 전생에 형제였나 봐요.(웃음) 오늘도 짜고 입은 것처럼 옷도 비슷하게 골라 입었더라고요.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이 친구랑은.”
한 사람은 88 서울올림픽 당시 레슬링에서 우리에게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김영남(48·사진 왼쪽) 씨,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당시 김씨에게 역전패해 은메달에 그쳤던 카자흐스탄(당시 구소련)의 파올렛(46) 씨다.
현재 김씨는 파올렛 씨의 나라인 카자흐스탄에서 건설업체 ‘천산개발’과 자원개발업체 ‘카즈너지’ 등을 거느린 성공한 기업인이다. 흥미로운 점은 김씨에게 카자흐스탄에서의 사업을 권유하고 도와준 사람이 다름 아닌 파울렛 씨라는 것. 확실히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잘나가던 모든 것 포기 새로운 도전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중 첫 번째로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을, 다음으로는 카자흐스탄에 간 것을 꼽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간 것은 파올렛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올림픽의 궁극적인 의미는 스포츠로 평화와 우정을 나누자는 것이지, 감정을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물론 경기에서 졌을 땐 서운했지만, 그것이 우정을 맺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습니다.”(파올렛)
두 사람은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2, 3년 전 국제경기에서 처음 만났고,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까워졌다. 당시 시상식에서 김씨는 패자인 파올렛 씨의 손을 들어올려 위로했는데, 파올렛 씨는 김씨의 그런 배려가 가슴 깊이 남았다고.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둘은 국제경기에서 자주 만났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에요. ‘영남, 프리즈 텔미, 빨리빨리.’(웃음) 사랑하면 다 통한다고 하잖아요.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마디 말과 손짓만 주고받아도 다 통하거든요.”
1991년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이후 파올렛 씨는 카자흐스탄 체육계의 거물로 성장했다(얼마 전까지 카자흐스탄 관광체육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여러 개의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파올렛 씨는 김씨를 만날 때마다 카자흐스탄에서 사업을 하라고 권유했고, 이는 김씨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씨는 1997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갔다. 외환위기 때였지만 국가대표팀과 삼성생명 레슬링팀 코치를 겸임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김씨가 모든 걸 포기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만류했다.
“용단이었죠. 함평에 계신 부모님은 잘나가는 아들이 왜 이름도 낯선 땅에 가려는지 이해하지 못하셔서 눈물로 말리셨어요. 하지만 뭔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 용단을 내려야 했고, 지금도 그때의 선택이 옳았다고 봅니다.”
88 서울올림픽 당시 김영남(가운데)과 파올렛(왼쪽).
“농고에 다니다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늦깎이로 레슬링을 시작했어요. 레슬링을 하다 보니 국가대표라는 목표가 생겼고, 이후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가 생겼죠.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는 지도자로서 금메달을 만들어냈고요. 하지만 레슬링 같은 비인기 종목은 ‘그 이후’에 대한 비전이 없습니다. 뭐든 미쳐서 도전했는데,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전하고 불안했어요. 목표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잖아요.”
목표를 찾아간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는 가장 먼저 외환위기로 인해 국내에 재고로 쌓인 국산 자동차를 가져다 카자흐스탄에 파는 무역업을 했다. 반응이 좋아 쉽게 수십억원 가까운 돈을 벌었지만, 곧 이어 다른 사업에 투자해 실패를 거듭하면서 모두 잃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사업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 3년은 흔들렸어요. 동물의 왕국에서 저는 초식동물이었죠. 하지만 10년을 보고 갔기 때문에 크게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레슬링을 시작하고 10년 만에 금메달을 땄거든요.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10년을 미쳐서 매달린다면 못해낼 게 없다고 자신합니다.”
10년 만에 사업에서 금메달 획득
이후 김씨는 부동산 개발업과 건설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이 2000년 이후 연간 10% 이상 성장을 거듭하면서 불어닥친 부동산 붐을 타고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본인은 재산을 밝히기 거부했지만 김씨는 현재 1000억원 가까이 자산을 일군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말한 10년 계획이 이뤄진 셈이다.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라는 점은 카자흐스탄에서도 큰 도움이 돼요. 전직 대통령이 레슬링 선수였을 정도로 레슬링의 인기가 높고, 무엇보다 금메달리스트라는 점에서 저에게 신뢰를 보이거든요.”
김씨와 파올렛 씨는 지금도 카자흐스탄의 레슬링 체육관을 종종 찾아가 현지 선수들을 지도하며 몸을 푼다. 한때 링에서 맞수였던 두 사람은 현재 카자흐스탄 자원개발이나 건설 등 몇몇 분야에서 동업을 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이 처음부터 “고향처럼 친근했다”는 김씨처럼 파올렛 씨 역시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가 관광체육부 장관으로 재임할 당시 카자흐스탄 여자대표팀 사령탑에 한국인 코치가 임명된 것이나, 태권도와 양궁대표팀이 한국인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앞으로 둘만의 우정을 넘어 두 나라가 친선을 쌓는 데 가교 구실을 하길 희망했다.
“이 친구와 저의 목표는 둘이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최고 기업을 일구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국과 카자흐스탄 두 나라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