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왼쪽)은 9월7일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압박했다.
‘연합뉴스’가 10월31일 보도한 “정부 ‘종전선언’ 구상 의미와 전망” 제하의 기사 도입부다. 이 기사엔 ‘선(先)평화협상 개시·후(後)정치적 추동 논리’ ‘美 반응·비핵화 진전이 핵심 변수’라는 부제가 붙었다.
꼭 오래된 테이프를 다시 돌리는 느낌이다. 헛발질로 힘만 빼다 출발점으로 돌아온 꼴이다. 시계추를 6자회담 2·13합의 직후로 돌려보자.
“2·13합의 초기단계 이행 시 종전선언 가능하다.”(3월13일자 국정브리핑 기사 제목)
“4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동북아 평화체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결단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3월21일 이해찬 전 총리)
이호철 국정상황실장, 안희정 씨 등과 함께 대북문제에 깊숙이 관여한 L 의원(대통합민주신당)은 올 3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지난해 11월)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한국전의 공식 종료 선언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취지로 얘기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하노이에서 어렵게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평화협정 문제만큼은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해서 만든 기회입니다. 대통령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부시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하노이 정상회담 부시 발언 실언 가능성 커
노무현 정부는 임기 내 종전선언에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정상이 한반도에 모여 종전선언에 서명하는 이벤트는 ‘압록강도 놀랄’ 사건이다. 그러나 종전선언 당사자인 미국의 동의가 필수불가결한데, 미국은 종전선언엔 큰 관심이 없는 모습이다.
9월7일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 부시 미 대통령의 의지를 확인하려 했으나 부시 대통령은 즉답을 피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정상 간의 만남은 평화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하다는 게 미국의 의견”이라고 못 박았다.
하노이 정상회담 직후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이 북한의 핵폐기 시 상응하는 조치로 “한국전의 공식 종료 ‘선언’이 포함될 수 있다”고 밝혔을 때를 제외하면 미 행정부 인사들이 직접적으로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시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실제 ‘종전선언’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스노 대변인은 ‘종전선언(a declaration of the end of the Korean War)’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후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은 미 행정부 인사들의 발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부시가 그런 발언을 했다면 실언(失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미국 인사들은 ‘평화협정(official end of the Korean War)’으로 읽혀야 하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을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분리해 생각하던 한국 정부가 ‘종전선언’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실언’에 정부가 홀렸다는 분석도 가능하다.”(한 국책연구소 관계자)
청와대는 10월5일 윤병세 대통령 외교안보수석을 미국에 보내는 등 수차례에 걸쳐 미국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미국 측이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부정적인 입장을 바꿔놓으려는 ‘외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평화체제 프로세스’는 핵불능화→종전선언→핵폐기 협상 완료→평화협정 체결 및 북-미수교 순서다. 국가정보원 산하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방안은 지난해 가을 청와대 안보실에 처음 정식으로 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안은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에 상징적 행사인 종전선언을 끼워넣음으로써 조기에 ‘성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종전선언이 핵폐기와 평화협정 체결로 가는 길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종전선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따라서 종전선언은 한국전 종결을 선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10월30일 김만복 국정원장의 국정브리핑 기고문)
문제의 핵심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느냐다. 부시 대통령의 지난해 11월 하노이와 9월 시드니 발언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전문가는 집권 측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뭔가에 홀린 것”이라고 말했다.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종전선언이라는 토픽을 정리하면 협상과정에서 미국이 수세에 처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워싱턴이 던진 한 토픽을 서울이 잘못 물었다. 종전선언으로 얻게 될 미국의 실익은 거의 없다. 골치 아픈 문제들만 산적하게 된다. 종전선언을 하면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비롯해 정전상태의 여러 문제가 잇따라 처리돼야 한다. 집권 측이 마치 ‘종전선언’이라는 집단최면에라도 걸려 있는 것 같다.”
청와대·국정원 비현실적, 외교부는 현실적
‘북한 핵무기 및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폐기’가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이라는 게 미국의 공식적인 견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3자 혹은 4자 정상의 종전선언이라는 임기 말 이벤트를 추진하려던 집권 측의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청와대, 국정원과 달리 외교부의 견해는 현실적이다. 송민순 외교부 장관은 10월31일 정례브리핑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과 관련해 “먼저 실무선에서 시작해 협상하다 보면 가파른 단계에서 정치적 추동력이 필요할 때 대화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평화체제 문제는 6자회담에서 하는 게 아니고 (6자회담) 9·19 공동성명 규정대로 ‘직접 관련 당사자들 사이 별도 포럼’에서 하는 것”이라고 밝혔으며 “외교부 장관이 밝힌 내용이 정부의 입장”이라고도 했다. 외교부가 절충점을 찾아 수습에 나선 모양새다. 그러나 레토릭으로 가득한 송 장관의 발언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의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진다’는 조항을 재확인한 수준이다. 6·25전쟁의 직접 당사국이 참여할 것으로 보이는 포럼은 9·19 공동성명에 따라 진행되는, 새로울 게 없는 ‘기존의 프로세스’일 뿐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과 종전선언 구상은 “구체적으로 정리되고 있다”기보다는 출발점 주위를 뱅뱅 돌며 알맹이 없이 요란하기만 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인다. 집권 측은 임기 중 ‘성과물’을 내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11월7일로 예정된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미국을 설득해 ‘주체가 정상이 되는’ 종전선언이 내년 초 추진될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