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영국 캐너리워프에서 열린 노동문제 관련 콘퍼런스에서 발언 중인 셰리 블레어.
그런데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바로 다우닝가 10번지의 안주인인 총리 부인 셰리 블레어다. 정작 블레어 총리는 사임 발표 후 해외 순방외교 등으로 10년 임기를 정리하는 데 비해 셰리 블레어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행보를 잇따라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영국 공영방송인 BBC가 10만 파운드(약 1억8000만원)나 되는 예산을 쏟아부으며 셰리의 총리실 생활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독립 프로덕션이 제작을 맡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시청자들 주머니에서 예산이 나가는 셈이니 여론의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다.
‘셰리 앙투아네트’ 별명 얻어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평소 언론이 자신의 사생활을 캐는 데 거부 반응을 보였던 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이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다우닝가 10번지에까지 제작진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BBC 간판급 진행자인 피요나 브루스를 아프리카 순방길에 동행시키는 등 자신의 이미지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01년 셰리 블레어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제작자 린다 맥도걸조차 “당시 총리실은 셰리의 지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총리실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총리실의 이런 분위기 변화는 블레어 총리 퇴임 후 셰리의 행보와 관련해 다양한 관측을 낳고 있다. 가장 관심을 모으는 부분은 셰리가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진 채 쓸쓸히 퇴임하는 남편의 뒤를 이어 정치적 진로를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대목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셰리 블레어는 잘나가던 인권변호사 출신이다. 수습 변호사 시절 토니 블레어를 만나 1980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몇 해 뒤 동시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셰리는 실패하고 토니만 당선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열성 노동당원이던 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에 입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어떤 면에서 셰리는 남편을 능가하는 정치적 야심의 소유자다. 영국 언론이 셰리를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 상원의원에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총리 부인으로서 셰리는 그리 좋은 이미지를 남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치스런 궁정생활에 탐닉했던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빗대 ‘셰리 앙투아네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그는 상류층 문화를 즐긴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총리 부인 자격으로 아프리카 정상들과 잇따라 회담을 갖는 등 ‘오버’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왼쪽)와 차기 총리로 떠오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토니 블레어의 총리 재임기간 곱지 않은 시선에도 ‘총리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권변호사’ 셰리 블레어로서 행보를 고집하던 그가 남편의 사임 발표 후 본격적으로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셰리는 사임 발표 직후 가진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범죄를 저지른 임신 여성을 교도소에 수감하는 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는 영국 내무부 측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정도 발언은 여성 인권변호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블레어 총리의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세간의 눈길 때문에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온 셰리인 만큼 이 발언은 ‘퇴임 후 정치’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거짓말 사건 뿌리 깊은 불신
한 걸음 더 나아가 셰리는 영국의 형사 및 교정정책 전반을 재검토하기 위한 독립위원회 결성을 주도해 브라운 장관 측을 긴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인권변호사답게 이 위원회 명단에 정부의 형사정책에 영향력을 미칠 만한 법조인, 언론인 등 중량급 인사들까지 포진해놓았다. 셰리가 위원장을 맡을 이 위원회는 브라운 장관의 총리 취임 직후 노동당 정부의 형사정책에 대한 실태 조사작업을 개시한다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셰리는 이 기구와 관련해 “범죄자들의 사회적 격리 문제뿐 아니라 교화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정치권에서는 ‘범죄와의 전쟁’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차기 브라운 정권과 셰리 블레어가 대립각을 세울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런 시각은 과거 셰리와 브라운 장관 사이를 갈라놓았던 ‘악연’을 기억하는 대부분 영국인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여름 노동당 전당대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거짓말’ 발언 파문이다. 지난해 노동당 전당대회는 남편인 블레어가 노동당수 자격으로 참석하는 마지막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노동당 지지자들은 물론 정치권 전반의 관심이 온통 블레어의 연설 내용에 쏠렸다.
그러나 셰리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블레어 총리가 당시 영국 언론을 뒤덮던 ‘블레어-브라운 불화설’을 부인하며 브라운 장관을 치켜세울 때 객석에 있던 셰리가 ‘거짓말!’이라며 비아냥거린 것이 화근이었다. 무심코 내뱉은 셰리의 이 말이 우연히 옆에 있던 블룸버그 통신 신참내기 기자 귀에 들어갔고, 다음 날 대부분 영국신문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이처럼 브라운 장관 진영에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던 셰리가 브라운의 총리 취임을 앞두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정치 행보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브라운 장관 진영에 심상치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우에 따라 셰리가 브라운 장관의 정적으로 떠오를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블레어 총리에 비해 대중적 이미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시달리는 브라운 장관으로서는 또 하나의 복병을 만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