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그의 영화를 알고 있다. 덴마크의 한 병원에서 일어나는 유령 소동을 그린 ‘킹덤’, 눈이 점점 멀어가는 사형수 여인의 슬픈 아메리칸드림을 보여준 ‘어둠 속의 댄서’, 한 마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미국인 아가씨의 수난사 ‘도그빌’…. 덴마크의 문제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이번엔 코미디를 만들었다.
‘킹덤’의 호러, ‘어둠 속의 댄서’의 멜로, ‘도그빌’의 누아르 장르. 내가 보기에 장르란 장르는 죄다 변칙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미학을 시험해보는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인데, 그는 짐짓 “이번 영화가 내가 만드는 마지막 장르 영화”라며 배수진을 친다.
제목에 느낌표가 2개나 들어간 영화 ‘오! 마이 보스!’는 가짜 사장, 또는 사장의 사장에 대한 코미디다. 직원이 6명뿐인 작은 회사 사장 라운(피터 갠츨러 분)은 조만간 회사를 매각하려 한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겼기에 가족처럼 지낸 동료에게 미움 사는 일이 두렵다. 고민 끝에 연극배우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 분)를 섭외한 그는 크리스토퍼에게 가짜 사장 노릇을 시킨다.
그런데 직원들 보기에는 미국에 10년 동안 있었다던 이 사장, 하는 짓이 좀 이상하다. HR(인사·human resource)의 H도 모르고 IT(정보기술)의 I자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크리스토퍼는 크리스토퍼대로 사장이 저질러놓은 일 수습하기에 바쁘다. e메일로 여사원에게 청혼까지 한 라운 대신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육탄공세를 퍼붓는 또 다른 여직원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상황. 게다가 라운이 해고하는 바람에 자살한 남자 직원의 아내도 마음에 걸린다. 서로에게 점차 꼬여가면서 회사는 서서히 진실을 직면하게 되는데…. 끝까지 사장임을 밝히기 꺼리는 라운, 어떻게든 그가 사장이라고 실토하게 만들려는 크리스토퍼. 이들의 게임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일단 영화는 눈이 아플 정도로 많은 점프컷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나 편집하고 있어요’라고 광고하듯, 영화 내내 편집의 솔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할리우드에서야 컷이 바뀌는 것을 눈치 못 채게 하는 불가시 편집이 정칙처럼 돼 있는데, ‘오! 마이 보스!’에서는 일부러 이를 깨는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100대의 디지털 카메라를 시험해본 트리에가 이번에는 ‘오토마 비전’이라는 새로운 촬영·편집 방법으로 자신의 영화미학을 시험한다.
오피스 코미디물 … ‘오토마 비전’ 새 촬영기법 도입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몇 군데 지정하고 그 지점에 카메라를 고정 설치한다. 그 후 촬영된 화면 중 일정 프레임을 선택한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프로그램이 지정하는 가장 좋은 장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눈이 아플 만큼 계속해서 점프컷으로 컷이 넘어가는 통에 관객 처지에서는 영화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감독의 주관적 의도를 배제하겠다는 정신은 가상하나 결과적으론 영화 내내 장르에 몰입하지 못하는 일종의 ‘거리두기’ 방법이 돼버린다.
게다가 트리에 본인이 영화 처음과 중간에 불쑥 내레이션을 깔면서, 또 다른 거리두기를 장치해둔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무해하며 설교를 하지도 않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면서 트리에 특유의 자의식을 슬며시 내보인다. 한마디로 트리에의 영화가 아니라 고다르(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의 영화 같다.
이 모든 것이 장르 영화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든 장르 영화를 해체하고 싶어하는 이중적 욕망에 시달리는 트리에의 악마적 장르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인공적인 촬영이나 녹음을 피하고, 들고 찍기 등으로 영화의 문학적·회화적 요소를 배제한다.
영화 속에서 한 직원이 “도그마 영화는 인생과 비슷하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중요하다”고 토로하는데, 이야말로 트리에의 심경일지도 모른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선 누벨바그에서 다 한 일을 새삼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따라서 기승전결의 구성이 거의 없이 계속해서 툭툭 튀는 화면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 옛날 에른스트 루비치식의 매끈한 할리우드 코미디가 그립다. 아닌 게 아니라 소재만 놓고 보면, 루비치의 ‘죽느냐 사느냐’에서 배우가 히틀러 역을 감쪽같이 하는데 히틀러 대신 자본주의 총아인 기업체 사장으로 주인공이 바뀌었을 뿐이다. 정체성 오인이 코미디 장르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때, 왜 아직도 가짜 사장 이야기가 안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는 직원들에게 욕먹기 싫었던 크리스토퍼마저도 “나 역시 사장이 있다”고 내세우며 절정으로 향한다. 웃음의 시동이 부르릉 걸리는 것. 여기에는 온갖 악덕, 불법, 착취를 감행하지만 좋은 모습으로만 대중에게 남기 원하는 기업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 숨어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사장 역할을 ‘곰’에 빗대 풍자한다(아마도 덴마크의 문화적 코드가 들어간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직원들은 사장의 빈자리에 곰 인형을 앉히고, 진짜 사장이 나타나자 “덴마크의 가을은 너무너무 덥다”며 오히려 사장에게 달려든다.
좋은 모습만 원하는 기업 통렬한 조롱
분을 삭이지 못하고 사장에게 한 방 먹이는 직원. 곰 인형도 해낼 수 있는 유령 사장. 어찌 보면 있는 듯 없는 사장의 존재감에 비해 직원들은 파격적인 행동을 펼친다. 이는 자본주의의 상하관계가 완전히 역전돼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코미디언 감비니의 숭배자인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해야 하는 아이슬란드 사장이 감비니의 팬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니 누가 이 가짜 사장을 말릴 것인가(감비니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트리에가 칸영화제 이후 덴마크까지 차로 오면서 발견한 트럭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트리에가 존경하는 이는 직설적인 화법과 사회풍자로 유명한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인 것 같다).
‘오! 마이 보스!’는 트리에 특유의 장르영화 같은 예술영화이면서 동시에 예술영화 같은 장르영화다. 제목에 이미 느낌표가 2개나 들어가 있지만, 관객에게도 과연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느낌표 2개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코미디로 별 2개만 받을 것인가. “오! 마이 라스 폰 트리에!” 지켜볼 일이다.
‘킹덤’의 호러, ‘어둠 속의 댄서’의 멜로, ‘도그빌’의 누아르 장르. 내가 보기에 장르란 장르는 죄다 변칙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미학을 시험해보는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인데, 그는 짐짓 “이번 영화가 내가 만드는 마지막 장르 영화”라며 배수진을 친다.
제목에 느낌표가 2개나 들어간 영화 ‘오! 마이 보스!’는 가짜 사장, 또는 사장의 사장에 대한 코미디다. 직원이 6명뿐인 작은 회사 사장 라운(피터 갠츨러 분)은 조만간 회사를 매각하려 한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겼기에 가족처럼 지낸 동료에게 미움 사는 일이 두렵다. 고민 끝에 연극배우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 분)를 섭외한 그는 크리스토퍼에게 가짜 사장 노릇을 시킨다.
그런데 직원들 보기에는 미국에 10년 동안 있었다던 이 사장, 하는 짓이 좀 이상하다. HR(인사·human resource)의 H도 모르고 IT(정보기술)의 I자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크리스토퍼는 크리스토퍼대로 사장이 저질러놓은 일 수습하기에 바쁘다. e메일로 여사원에게 청혼까지 한 라운 대신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육탄공세를 퍼붓는 또 다른 여직원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상황. 게다가 라운이 해고하는 바람에 자살한 남자 직원의 아내도 마음에 걸린다. 서로에게 점차 꼬여가면서 회사는 서서히 진실을 직면하게 되는데…. 끝까지 사장임을 밝히기 꺼리는 라운, 어떻게든 그가 사장이라고 실토하게 만들려는 크리스토퍼. 이들의 게임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일단 영화는 눈이 아플 정도로 많은 점프컷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나 편집하고 있어요’라고 광고하듯, 영화 내내 편집의 솔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할리우드에서야 컷이 바뀌는 것을 눈치 못 채게 하는 불가시 편집이 정칙처럼 돼 있는데, ‘오! 마이 보스!’에서는 일부러 이를 깨는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100대의 디지털 카메라를 시험해본 트리에가 이번에는 ‘오토마 비전’이라는 새로운 촬영·편집 방법으로 자신의 영화미학을 시험한다.
오피스 코미디물 … ‘오토마 비전’ 새 촬영기법 도입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몇 군데 지정하고 그 지점에 카메라를 고정 설치한다. 그 후 촬영된 화면 중 일정 프레임을 선택한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프로그램이 지정하는 가장 좋은 장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눈이 아플 만큼 계속해서 점프컷으로 컷이 넘어가는 통에 관객 처지에서는 영화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감독의 주관적 의도를 배제하겠다는 정신은 가상하나 결과적으론 영화 내내 장르에 몰입하지 못하는 일종의 ‘거리두기’ 방법이 돼버린다.
게다가 트리에 본인이 영화 처음과 중간에 불쑥 내레이션을 깔면서, 또 다른 거리두기를 장치해둔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무해하며 설교를 하지도 않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면서 트리에 특유의 자의식을 슬며시 내보인다. 한마디로 트리에의 영화가 아니라 고다르(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의 영화 같다.
이 모든 것이 장르 영화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든 장르 영화를 해체하고 싶어하는 이중적 욕망에 시달리는 트리에의 악마적 장르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인공적인 촬영이나 녹음을 피하고, 들고 찍기 등으로 영화의 문학적·회화적 요소를 배제한다.
영화 속에서 한 직원이 “도그마 영화는 인생과 비슷하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중요하다”고 토로하는데, 이야말로 트리에의 심경일지도 모른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선 누벨바그에서 다 한 일을 새삼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따라서 기승전결의 구성이 거의 없이 계속해서 툭툭 튀는 화면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 옛날 에른스트 루비치식의 매끈한 할리우드 코미디가 그립다. 아닌 게 아니라 소재만 놓고 보면, 루비치의 ‘죽느냐 사느냐’에서 배우가 히틀러 역을 감쪽같이 하는데 히틀러 대신 자본주의 총아인 기업체 사장으로 주인공이 바뀌었을 뿐이다. 정체성 오인이 코미디 장르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때, 왜 아직도 가짜 사장 이야기가 안 나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영화는 직원들에게 욕먹기 싫었던 크리스토퍼마저도 “나 역시 사장이 있다”고 내세우며 절정으로 향한다. 웃음의 시동이 부르릉 걸리는 것. 여기에는 온갖 악덕, 불법, 착취를 감행하지만 좋은 모습으로만 대중에게 남기 원하는 기업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 숨어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사장 역할을 ‘곰’에 빗대 풍자한다(아마도 덴마크의 문화적 코드가 들어간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직원들은 사장의 빈자리에 곰 인형을 앉히고, 진짜 사장이 나타나자 “덴마크의 가을은 너무너무 덥다”며 오히려 사장에게 달려든다.
좋은 모습만 원하는 기업 통렬한 조롱
분을 삭이지 못하고 사장에게 한 방 먹이는 직원. 곰 인형도 해낼 수 있는 유령 사장. 어찌 보면 있는 듯 없는 사장의 존재감에 비해 직원들은 파격적인 행동을 펼친다. 이는 자본주의의 상하관계가 완전히 역전돼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코미디언 감비니의 숭배자인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해야 하는 아이슬란드 사장이 감비니의 팬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니 누가 이 가짜 사장을 말릴 것인가(감비니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트리에가 칸영화제 이후 덴마크까지 차로 오면서 발견한 트럭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트리에가 존경하는 이는 직설적인 화법과 사회풍자로 유명한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인 것 같다).
‘오! 마이 보스!’는 트리에 특유의 장르영화 같은 예술영화이면서 동시에 예술영화 같은 장르영화다. 제목에 이미 느낌표가 2개나 들어가 있지만, 관객에게도 과연 새로운 영화미학으로 느낌표 2개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코미디로 별 2개만 받을 것인가. “오! 마이 라스 폰 트리에!”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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