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는 월남(越南)이라고 쓰는 베트남.
우리로서는 1960년대 베트남전 파병과 관련된 슬픈 현대사의 인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하며 막연히 긴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막상 베트남 땅을 밟아보면 동남아시아 여느 여행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오랜 지배와 근대 서구열강의 식민통치를 이겨낸 강인한 민족답게 베트남인들은 어딘지 모르게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뭐,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끝이지만…. 크지 않은 체구는 편안함을 주며,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본 솜씨가 여기저기에서 묻어나 그리 낯설지 않다.
전쟁으로 황량해진 이 땅에 본격적인 희망의 새싹이 돋아난 건 도이모이(개방) 정책에 의한 베트남식 사회주의가 빠르게 정착하면서다. 이는 굶고서는 이념도 체제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가 적용된 것이다.
길쭉한 모양의 국토 북쪽에 자리한 수도 하노이는 정치의 중심지이고 베트남 최대 도시 호치민(구 사이공)은 경제의 중심지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베트남 경제의 기점인 메콩델타(메콩 삼각주)로 가는 길은 호치민에서 출발한다.
보통 ‘메콩델타 투어’라 불리는 이 여행은 호치민 시내 곳곳에 있는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입해 떠나는 것이다(베트남에는 여행자를 위해 각 도시간의 이동수단을 제공하는 오픈투어 및 도시와 주변 관광지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며 값도 저렴한 편이다).
메콩델타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당일 투어와 더 긴 일정의 투어로 나뉘는데 나는 1박2일을 택했다. 지도와 안내서를 살펴보니 이틀이면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고, 알뜰여행을 하는 듯한 다른 외국 여행객들의 선택도 참고했다. 실은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겁나는 터라 오케이를 연발했더니 바로 표를 끊어주었다.
아침 7시부터 호치민의 사이공강을 보트로 3시간 동안 가로지르며 미토(My Tho)로 향했다. 위태롭게 세워진 수상가옥과 열대나무, 배에 실린 다양한 물품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상쾌했던 건 피부에 와닿는 산들바람이었다.
미토에서는 과일농장과 밀림을 통과하는 나룻배 체험을 했다. ‘논라’라 불리는 베트남 모자를 쓴 아낙 둘이 앞뒤에 앉아 4명의 승객을 나룻배에 태우고 몇 분간 강 지류의 밀림을 헤치며 항해하는 이 체험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한편으론 인위적으로 ‘설정’된 코스와 밀려드는 여행객들로 피로를 느끼는 아낙들의 모습에서 즐거움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인도차이나 젖줄 … 다채로운 삶 ‘수산시장’ 늘 북적
그 다음 향한 곳은 코코넛 농장. 코코넛 열매 껍질로 캔디를 만드는 농장 인부들의 수작업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다. 이곳에 반한 관광객들은 대부분 지갑을 꺼내 코코넛 캔디를 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루 종일 메콩강 여기저기를 다니며 큰 보트, 작은 보트로 여러 번 나눠 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콩강의 수많은 지류에서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룻밤을 묵기 위해 델타지역 최대 도시 칸토(Can Tho)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곳에 머물기로 결심한 것은 수상시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규모가 큰 ‘카이랑 수상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북적댔다. 뱃머리에 올빼미 눈을 그려 넣은 크고 작은 배들. 여기에 저마다 다양한 물건을 싣고 온 상인들이 제품을 사고파는 모습은 델타지역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과일은 물론 고기, 빵, 음료수 등 식료품과 생필품의 매매가 모두 움직이는 배 위에서 이뤄졌다. 경운기 엔진을 개조해 스크루에 연결한 개조형 나룻배와 노를 젓는 쪽배가 사람들의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호치민 거리가 시클로(인력거)를 끄는 노부(老夫)와 날렵하게 오토바이를 모는 푸른 아오자이의 소녀가 조화를 이룬다면, 이곳은 엔진 달린 배를 몰며 과일을 파는 소년과 반미(저렴한 빵의 일종)를 팔기 위해 힘겹게 나룻배의 노를 젓는 노파가 공존한다. 언뜻 보기엔 매우 혼잡한 듯하지만, 그들만의 질서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까지 오는 4500km의 메콩강(강이 여러 개 합쳐졌다는 의미를 지닌다)은 이렇게 인도차이나의 젖줄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다.
과거엔 그저 물이 푸르고 맑아야 ‘강(江)’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배에 멍하니 앉아 있다 과일장수가 내민 파인애플 조각을 받아들며 불현듯 생각이 바뀌었다. 흙탕물로 뒤범벅된 생동감 넘치는 이 강이 오히려 ‘강’이나 ‘젖줄’이란 표현과 어울린다고 느껴진 것. 달디단 파인애플을 한 조각 베어무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엔 ‘평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애초 크메르 제국 소유였던 메콩델타를 최근 무력으로 병합한 것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베트남의 행동이 아니었던가. 폴 포트 정권을 축출하던 당시를 아직도 기억하는 크메르인이 상당수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느껴지는 평화라니….
그러나 난 곧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는 분명 중요하지만 현실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 희생자와 정복자의 역할이 반복될지언정 생존의 현실에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으며, 그 타협의 정점에는 평화가 흐른다는 것을 말이다.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길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살색 빛에 가까운 강물에서 물장구치며 목욕을 하는 마을 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메콩강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은 그렇게 소리 없이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1960년대 베트남전 파병과 관련된 슬픈 현대사의 인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하며 막연히 긴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막상 베트남 땅을 밟아보면 동남아시아 여느 여행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오랜 지배와 근대 서구열강의 식민통치를 이겨낸 강인한 민족답게 베트남인들은 어딘지 모르게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뭐,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끝이지만…. 크지 않은 체구는 편안함을 주며,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다.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본 솜씨가 여기저기에서 묻어나 그리 낯설지 않다.
평화롭게 노를 저으며 메콩강을 건너는 유역의 마을 주민(왼쪽). 메콩강 지류의 밀림을 헤치며 항해하는 나룻배 체험.
길쭉한 모양의 국토 북쪽에 자리한 수도 하노이는 정치의 중심지이고 베트남 최대 도시 호치민(구 사이공)은 경제의 중심지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베트남 경제의 기점인 메콩델타(메콩 삼각주)로 가는 길은 호치민에서 출발한다.
보통 ‘메콩델타 투어’라 불리는 이 여행은 호치민 시내 곳곳에 있는 여행사에서 티켓을 구입해 떠나는 것이다(베트남에는 여행자를 위해 각 도시간의 이동수단을 제공하는 오픈투어 및 도시와 주변 관광지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며 값도 저렴한 편이다).
메콩델타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당일 투어와 더 긴 일정의 투어로 나뉘는데 나는 1박2일을 택했다. 지도와 안내서를 살펴보니 이틀이면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고, 알뜰여행을 하는 듯한 다른 외국 여행객들의 선택도 참고했다. 실은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겁나는 터라 오케이를 연발했더니 바로 표를 끊어주었다.
아침 7시부터 호치민의 사이공강을 보트로 3시간 동안 가로지르며 미토(My Tho)로 향했다. 위태롭게 세워진 수상가옥과 열대나무, 배에 실린 다양한 물품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상쾌했던 건 피부에 와닿는 산들바람이었다.
미토에서는 과일농장과 밀림을 통과하는 나룻배 체험을 했다. ‘논라’라 불리는 베트남 모자를 쓴 아낙 둘이 앞뒤에 앉아 4명의 승객을 나룻배에 태우고 몇 분간 강 지류의 밀림을 헤치며 항해하는 이 체험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한편으론 인위적으로 ‘설정’된 코스와 밀려드는 여행객들로 피로를 느끼는 아낙들의 모습에서 즐거움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인도차이나 젖줄 … 다채로운 삶 ‘수산시장’ 늘 북적
그 다음 향한 곳은 코코넛 농장. 코코넛 열매 껍질로 캔디를 만드는 농장 인부들의 수작업 과정은 무척 흥미로웠다. 이곳에 반한 관광객들은 대부분 지갑을 꺼내 코코넛 캔디를 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루 종일 메콩강 여기저기를 다니며 큰 보트, 작은 보트로 여러 번 나눠 타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콩강의 수많은 지류에서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배 위에서 고기를 파는 상인(왼쪽). 호치민시 주변의 수상가옥.
과일은 물론 고기, 빵, 음료수 등 식료품과 생필품의 매매가 모두 움직이는 배 위에서 이뤄졌다. 경운기 엔진을 개조해 스크루에 연결한 개조형 나룻배와 노를 젓는 쪽배가 사람들의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호치민 거리가 시클로(인력거)를 끄는 노부(老夫)와 날렵하게 오토바이를 모는 푸른 아오자이의 소녀가 조화를 이룬다면, 이곳은 엔진 달린 배를 몰며 과일을 파는 소년과 반미(저렴한 빵의 일종)를 팔기 위해 힘겹게 나룻배의 노를 젓는 노파가 공존한다. 언뜻 보기엔 매우 혼잡한 듯하지만, 그들만의 질서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까지 오는 4500km의 메콩강(강이 여러 개 합쳐졌다는 의미를 지닌다)은 이렇게 인도차이나의 젖줄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다.
과거엔 그저 물이 푸르고 맑아야 ‘강(江)’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배에 멍하니 앉아 있다 과일장수가 내민 파인애플 조각을 받아들며 불현듯 생각이 바뀌었다. 흙탕물로 뒤범벅된 생동감 넘치는 이 강이 오히려 ‘강’이나 ‘젖줄’이란 표현과 어울린다고 느껴진 것. 달디단 파인애플을 한 조각 베어무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엔 ‘평화’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애초 크메르 제국 소유였던 메콩델타를 최근 무력으로 병합한 것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베트남의 행동이 아니었던가. 폴 포트 정권을 축출하던 당시를 아직도 기억하는 크메르인이 상당수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느껴지는 평화라니….
그러나 난 곧 생각을 정리했다. 과거는 분명 중요하지만 현실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 희생자와 정복자의 역할이 반복될지언정 생존의 현실에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으며, 그 타협의 정점에는 평화가 흐른다는 것을 말이다.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길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살색 빛에 가까운 강물에서 물장구치며 목욕을 하는 마을 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메콩강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은 그렇게 소리 없이 평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