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한민국에선 리더십이 실종됐다고 한다. 곳곳에서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지만 갈등을 통합하는 인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제왕의 리더십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리더십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용력과 조화, 통찰력과 비전, 결단력과 추진력 등 리더가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제왕의 리더십’은 각 시대의 왕들이 주어진 역할을 얼마만큼 잘 수행했는지 따져본다. 또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했는지 되짚어봄으로써 21세기 리더의 모습을 제시한다.
먼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기 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유리왕을 살펴보자.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왕위에 오른 유리왕은 통찰력과 비전의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었다. 동가강 유역에 자리잡은 졸본의 지정학적 한계를 파악하고 국내성으로 천도, 이후 400여 년간 고구려가 큰 발전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한다.
백제 무령왕은 준비된 리더로서 결단력이 뛰어났다. 4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먼저 동성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고 있던 좌평 백가의 세력을 토벌한 뒤, 백가의 목을 잘라 백강에 던진다. 왕을 시해한 자를 단호하게 처벌함으로써 새로운 국왕의 위엄을 보여준다.
분열된 지역과 계층, 민족의 통합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고려 태조 왕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건은 포용력과 균형감각을 지닌 통합군주였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조의 새 주인이 됐지만 왕건 앞에는 장애물이 널려 있었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는 기나긴 내란으로 민심과 지역은 크게 분열돼, 사실 새 왕조는 이름뿐이었다. 왕건은 지방세력에 성씨를 내려주는 등 중앙과 지방이 서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정책을 펴며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옛 삼국문화를 흡수하고 인재를 폭넓게 등용해 민족 통합의 기틀을 마련한다.
공민왕은 누구 못지않게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재위 23년간 철저하게 자신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려 했다. 원나라와 측근세력, 외척과 관료집단 등의 틈바구니에서 신돈을 전위대로 내세워 개혁의 큰길로 나가려고 했다.
제도가 정비된 조선의 왕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왕권을 견제하는 장치가 적절히 운영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개창기 격동의 주인공 태종은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세력에 가차 없이 칼을 뽑았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었던 그는 권력 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였다. 조선 500년 내내 대립했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을 미리 내다보듯, 왕이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세종의 ‘함께하는 정치’ 키워드다. 세종은 출중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았다. 자주, 민본, 실용을 추구하며 전국의 인재를 모으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백성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스스로가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성군 중의 성군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상처난 정권을 물려받은 폭군 광해군은 알고 보면 탁월한 실리 외교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광해군은 후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명나라에 원병을 보냈지만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려 조선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코드 인사로 독선적인 국정운영을 펼침으로써 결국 인조반정을 부른다.
공과는 있겠지만 20명의 왕들에게서 적절한 정책 추진, 여론 존중, 도덕과 청렴성, 언로의 존중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육체적인 능력보다 인간의 창의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다. 즉, 개개인이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왕들에게 요구됐던 덕목들은 시대가 흘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김기흥·박종기·신병주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392쪽/ 1만8000원
‘제왕의 리더십’은 각 시대의 왕들이 주어진 역할을 얼마만큼 잘 수행했는지 따져본다. 또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했는지 되짚어봄으로써 21세기 리더의 모습을 제시한다.
먼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기 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유리왕을 살펴보자.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왕위에 오른 유리왕은 통찰력과 비전의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었다. 동가강 유역에 자리잡은 졸본의 지정학적 한계를 파악하고 국내성으로 천도, 이후 400여 년간 고구려가 큰 발전을 이루는 기초를 마련한다.
백제 무령왕은 준비된 리더로서 결단력이 뛰어났다. 4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먼저 동성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고 있던 좌평 백가의 세력을 토벌한 뒤, 백가의 목을 잘라 백강에 던진다. 왕을 시해한 자를 단호하게 처벌함으로써 새로운 국왕의 위엄을 보여준다.
분열된 지역과 계층, 민족의 통합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고려 태조 왕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건은 포용력과 균형감각을 지닌 통합군주였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조의 새 주인이 됐지만 왕건 앞에는 장애물이 널려 있었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는 기나긴 내란으로 민심과 지역은 크게 분열돼, 사실 새 왕조는 이름뿐이었다. 왕건은 지방세력에 성씨를 내려주는 등 중앙과 지방이 서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정책을 펴며 영향력을 확대해나간다. 옛 삼국문화를 흡수하고 인재를 폭넓게 등용해 민족 통합의 기틀을 마련한다.
공민왕은 누구 못지않게 개혁을 추진한 인물이다. 재위 23년간 철저하게 자신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려 했다. 원나라와 측근세력, 외척과 관료집단 등의 틈바구니에서 신돈을 전위대로 내세워 개혁의 큰길로 나가려고 했다.
제도가 정비된 조선의 왕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했다. 왕권을 견제하는 장치가 적절히 운영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개창기 격동의 주인공 태종은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세력에 가차 없이 칼을 뽑았다. 권력의 속성을 꿰뚫었던 그는 권력 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였다. 조선 500년 내내 대립했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을 미리 내다보듯, 왕이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세종의 ‘함께하는 정치’ 키워드다. 세종은 출중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았다. 자주, 민본, 실용을 추구하며 전국의 인재를 모으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백성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스스로가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성군 중의 성군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상처난 정권을 물려받은 폭군 광해군은 알고 보면 탁월한 실리 외교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광해군은 후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명나라에 원병을 보냈지만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려 조선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코드 인사로 독선적인 국정운영을 펼침으로써 결국 인조반정을 부른다.
공과는 있겠지만 20명의 왕들에게서 적절한 정책 추진, 여론 존중, 도덕과 청렴성, 언로의 존중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육체적인 능력보다 인간의 창의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다. 즉, 개개인이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왕들에게 요구됐던 덕목들은 시대가 흘러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김기흥·박종기·신병주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392쪽/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