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켓의 주류 코너. 프랑스인들은 술집보다는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 집에서 마시는 편이다.
술에 대한 사랑만큼 프랑스에선 술을 마실 때의 매너도 강조된다. 프랑스인들에게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처럼 과음으로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는 드물며, 조금씩 천천히 오랫동안 술 맛을 즐긴다. 즉 ‘즐기되, 폭음하지는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런 프랑스인들의 음주문화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조사 결과가 11월23일 발표돼 프랑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랑스 보건부에 제출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 상당수가 음주 과다 및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6000만 인구 중 약 10%에 해당하는 550만명이 상습적인 과다 음주자로, 이 가운데 200만명(3%) 정도가 알코올중독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매년 2만3000여명이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하고 있으며, 음주로 인한 각종 사고들을 고려했을 경우 매년 4만5000여명이 술 때문에 생명을 잃고 있다. 또 매해 3000명에 달하는 신생아들이 산모 음주 증후군을 앓고 있으며, 심각할 경우 선천적 장애 및 기형을 가지고 있다.
과도한 술 소비는 가계에도 많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프랑스인들의 평균 가계 지출을 살펴봤을 때 담배가 0.8%, 프랑스에서 허용되는 향정신성의약품(대마초 등)이 0.16%를 차지하는 반면 술은 1.42%를 차지한다. 또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한국과 달리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 집에서 즐기는 프랑스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같은 돈으로 한국보다 훨씬 많은 술을 소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6000원으로 생맥주 석 잔을 술집에서 마실 수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같은 돈으로 생맥주보다 도수가 높은 하이네켄 6캔(198cℓ)을 집에서 마실 수 있다.
국가적 차원 장기적 대책 요구
이 보고서는 알코올중독 환자에 대한 전문병원의 체계가 빈약하고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프랑스 인구 5분의 1이 살고 있는 파리와 주변 도시의 병원 전체를 통틀어 알코올중독 환자를 위한 침상은 245개에 불과해 1년에 500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다. 게다가 복잡한 여러 의료행정 체계는 환자들의 치료를 더욱 더디게 하고 있다.
보고서 책임자인 에르베 샤발리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 국가적 차원의 장기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과음은 마약과 같으며 각종 사고와 범죄를 부추기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교육이 절실하며, 특히 산모의 음주에 대해서는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보고서 내용에 보건 당국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적잖게 놀라고 있다. 우선 보건부는 알코올중독과 과다 음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공청회를 준비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금연 운동과 이에 따른 정책들에 뒤이어 이제는 과다 음주에 대한 각종 정책과 운동들이 예상되고 있다.
사실 10여년 전만 해도 프랑스에서 담배와 술은 삶의 여유와 자유를 상징하는 기호품이었다. 노천카페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쬐면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뒤적이는 여유로운 파리지앵, 저녁 만찬에 분위기를 살려주는 포도주,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끄는 맥주 한 잔. 하지만 이런 삶이 최근에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여유와 자유가 공적인 질서와 청결, 무엇보다도 프랑스에도 부는 웰빙 바람에 역행하기 때문.
담배와 달리 상습적인 음주문화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에서도 뿌리가 깊다. 유럽은 식수가 부족한 탓에 예로부터 물을 대신하는 음료로 술을 마셔왔기 때문. 놀라운 점은 19세기까지만 해도 10세 이상의 아동에게도 물을 대신한 술이 제공됐다는 사실.
그런데 아무리 음주로 인한 질병 및 사고가 많아진다고 해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삶의 큰 변화를 거부하는 프랑스인들이 과연 음주 습관을 쉽게 바꿀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