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정수사 전경.
함허동천을 지나자 정수사가 나온다. 정수사 어귀에는 동동주에다 떡을 파는 아주머니가 예전 모습 그대로다.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며 소나무 가지 위의 헌 집을 수리하는 까치도 여전하다.
산신각 밑에 있는 석중천(石中泉)으로 가 먼저 샘물 한 모금을 마신다. 다인들이 찻물로 부러워하는 물이다. 가을 물은 비가 자주 오는 여름보다 물맛 좋은 것이 상식이다. 일찍이 초의는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몸’이라 했다. 차와 물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조선 배불숭유에 맞서 수많은 저서 남겨
함허 스님이 조선 초 정수사(淨修寺)를 물 수(水)자를 넣어 정수사(淨水寺)로 바꿨을 정도라면 이곳의 물맛은 이미 검증된 것임이 틀림없다. 물가에서 맑은 물소리를 듣고 자란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최고로 친다고 했던가. 다인들에게 물은 악기와 같아서, 달고 무거운 물맛을 거문고의 저음 같다고 표현한다. 나그네는 정수사를 다시 찾으면서 큰 소득을 하나 올렸다. 지금까지 중국의 고불(古佛) 조주 스님의 다시로 알고서 다실 벽에 붙여놓고 감상하곤 했는데, 정수사에서 그것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함허 스님의 다시라니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른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습니다/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번 맛보십시오/ 한번 맛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납니다(一椀茶出一片心 一片心在一椀茶 當用一椀茶一嘗 一嘗應生無量樂).
차를 권하는 권다시(勸茶詩)라고나 할까. 함허 스님이 사형인 진산(珍山)과 옥봉(玉峰)의 영가 앞에서 향과 차를 올리며 지었다는데, 한 수가 더 전해지고 있다.
이 차 한 잔에/ 저의 옛정을 담았습니다/ 차는 조주 스님의 가풍/ 사형께 권하노니 한번 맛보십시오(此一椀茶 露我昔年情 茶含趙老風 勸君嘗一嘗).
충주 출생인 함허의 법명은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 함허(涵虛)는 그가 잠시 머물렀던 평산의 연봉사 작은 방 이름에서 연유한 당호다. 그는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관악산 의상암으로 입산한다. 이후 회암사로 가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절을 만행한 뒤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깨달음을 이룬다. 현등사와 정수사에 부도가 있고, 봉암사에 비가 있는 것만 봐도 그의 만행 흔적을 알 수 있다. 그는 봉암사를 크게 중수하고 난 뒤 ‘죽음에 이르러 눈을 드니 시방 세계 푸른 허공은 중유(中有)의 길이 없는 서방극락이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한다.
함허의 불교사적 위치는 조선 초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수호한 고승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선사이면서도 유교에 대응하기 위해 ‘현정론(顯正論)’,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 스승 무학대사와 달리 저서를 많이 남겼다. 불교와 유교, 도교가 하나로 회통한다고 주창한 것을 보면 당시의 불교탄압을 시정하고자 노력한 그의 호법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그의 저서로 ‘원각경소’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함허화상어록’ 1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숭유배불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함허 선사가 선열(禪悅)의 오롯한 시간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한 잔의 차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속에도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략) 화로에 차 달이는 연기 향기로운데/ 누각 위 옥전(玉篆)의 연기 부드러워라/ 인간 세상 시끄러운 일 꿈꾸지 않고/ 다만 선열 즐기며 앉아서 세월 보내네.
시비 많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차 한 잔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오늘 우리들이 귀감을 삼을 만하다.
☞ 가는 길
강화도에서 전등사 어귀까지 승용차로 30여분 거리, 다시 정수사까지는 6km 거리다. 강화도행은 차가 밀리지 않는 평일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