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 사건이 터진 직후 전·현직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요원들은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그러다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좀더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전직들조차 휴대전화를 꺼버리거나 접촉을 피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익명을 요구한 한 정보맨의 실토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이 DJ(김대중) 정부 때의 국정원도 도청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정보맨들은 정보 풍향에 예민해 김 의원의 발언이 어떤 폭풍을 몰고 올지 예측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국정원은 DJ 시절에도 도청이 이뤄졌다고 털어놓지 않았나.
도청 자료는 마력(魔力)이 있다. 이것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 읽지 않고는 못 배긴다. YS(김영삼) 시절 공운영 씨가 이끈 미림팀의 녹취록은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대공정책실장과 국내차장, 부장뿐만 아니라 안기부의 실장(지금은 국장)급 이상은 거의 읽어보았다.
DJ 시절 국정원은 미림팀처럼 마이크를 설치해놓고 원시적으로 녹음한 게 아니라, 휴대전화 도청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허가된 감청 영장에 슬쩍 유력 인사 이름을 끼워넣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감청을 했다.
당분간 도청 정국이 이어진다. DJ 집권 직후 북풍사건으로 국정원 직원들이 숙정된 사건이 반복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보맨들은 김 의원 발언에서 태풍이 불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몸을 낮추었다.”
국정원이나 777부대 같은 한국의 정보기관은 대북 정보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라는 미국의 CIA(중앙정보국)나 NSA(National Security Agency·국가안보국)를 앞서왔다. 그러나 미국 정보기관의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한반도에서만큼은 거미줄 정보망을 쳐놓은 한국 정보기관을 앞설 수 없다.
한국 정보기관은 핵 문제를 포함한 북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하고 대신 한반도 이외 지역에서 일어나는 한반도 관련 정보를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제공받아왔다. 이러한 정보 교류는 한-미 군사동맹 이상으로 한국을 지키는 중요한 발판이 되고 있다.
정보는 크게 정보관(情報官)이나 공작관(공작관의 임무를 대행하는 에이전트 포함), 그리고 체포(또는 귀순)한 적국(또는 경쟁국)의 간첩 등을 통해 수집 분석하는 ‘인간정보’와 적국에서 나오는 유·무선 신호를 포착 분석해서 확보하는 ‘신호정보’, 위성이나 정찰기로 적국을 촬영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상정보’로 나뉜다.
미국은 CIA, FBI, NSA, NRO 등 견제와 균형 이뤄
미국 정보기관 중에서 인간정보에 치중하는 것은 CIA다. 신호정보는 NSA가 담당한다. 적국은 정보기관이 신호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암호로 교신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NSA는 포착한 신호에 실려 있는 암호를 풀 수 있어야 한다.
1972년 미국은 NSA를 최고의 암호 해독기관으로 만들고 다른 기관에 암호 해독술을 전파해주는 중앙안보원(CSS, Central Security Service) 기능을 겸하게 했다(그래서 NSA는 NSA/ CSS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적국의 전략시설을 촬영하는 영상정보는 ‘국가정찰국’으로 번역되는 NRO(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가 맡는다.
국방부에서도 정보를 취급하는데, 국방부에는 DIA(Defence Intelligence Agency)로 불리는 ‘국방정보본부’가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정보부대, 그리고 각국에 나가 있는 무관들이 수집해온 인간정보와 영상정보를 취합한다. 신호정보는 각 군의 정보부대에서도 수집하지만 중요한 것은 NSA에 의존한다.
NSA는 매우 독특한 정보기관으로, 반(半)은 대통령에 직속돼 있고 반은 국방부에 소속돼 있다. 따라서 공무원인 민간인과 군인이 합동으로 근무하는데, 최고 책임자는 군인인 중장이 맡고 있다. 통신수단의 발달로 NSA는 3대 정보기관 중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생산하는 곳이 되었다. CIA가 생산한 정보 중 상당수는 NSA 정보에 인간정보를 보태 가공해낸 것이 적지 않다고 한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듯, 정보 독재를 막으려면 정보를 인간·신호·영상 정보로 나눠 각기 다른 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철학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정보를 독점한 사람이 가공할 권력을 휘두른 역사를 갖고 있다.
에드거 후버가 그 주인공인데, 후버는 1924년부터 72년 숨질 때까지 42년간 FBI(연방수사국) 국장을 하면서 8명의 미국 대통령을 주물렀다. 그가 장수한 첫째 이유는 FBI를 통해 입수한 각 대통령의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 이렇듯 정보의 힘은 막강해서 미국 정부는 인간정보를 다시 해외와 국내로 나눠, 해외 인간정보는 CIA, 국내 인간정보는 FBI에 맡기고 있다.
그럼 한국의 정보체계를 들여다보자. 전문가들은 “한국의 국가정보 체계는 인간정보와 영상정보는 국정원이 전담하고, 신호정보는 국정원과 777부대가 분점하는 체제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 외 경찰청 정보국이나 정보사·기무사 같은 정보기관이 있지만, 이 기관은 국정원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기 때문에 이 기관에서 생산한 정보는 전부 국정원에 보고된다. 심지어 777부대가 수집한 신호정보도 국정원에서 융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 씨로부터 도청 테이프를 제공받은 재미교포 박인회 씨(가운데).
NSA는 한국에 SUSLAK(서슬락, Special U.S. Liaison Advisor-Korea)이란 이름의 거점을 두고 있다. NSA는 SUSLAK을 통해 777부대에 자금과 첨단 감청 장비를 제공해주고 함께 북한에서 나오는 신호정보를 수집 분석한다. 그러나 북한 신호 분석에는 역시 777부대의 노하우가 앞서 있어, 주로 정보를 제공받는 쪽은 SUSLAK이 되고 있다. 반면 NSA는 777부대가 접할 수 없는 해외에서 입수한 한반도 관련 신호정보를 SUSLAK를 통해 777부대에 제공해주고 있다.
수년 전 NSA와의 정보교류를 놓고 국정원과 777부대가 대립한 적이 있었다. 국정원은 ‘국가 최고 정보기관은 국정원이니, 국정원이 NSA와 정보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777부대는 ‘신호정보는 777부대의 고유 영역이니 NSA와의 교류는 우리 부대가 계속해야 한다’고 맞섰던 것이 갈등의 원인.
국정원은 777부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므로 결국 NSA와 정보교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따냈다. 이를 계기로 국정원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간·신호·영상 정보를 모두 다루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정보기관이 되었다. 48년간 8명의 미국 대통령을 주무른 후버 국장보다 더 큰 ‘정보공룡’이 될 수 있는 토대를 갖춘 것이다. 이것이 ‘한국적 정보 오용’을 낳았다.
미국이 정보기관을 나눠놓은 것은 정보 기관끼리의 견제와 경쟁이 미국 대통령에게 더욱 객관화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올린 정보 판단이 다를 경우 이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한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정보가 국정원으로 집중되므로 대통령은 국정원이 판단해준 정보를 제공받는다. 판단권을 상실한 대통령은, 물론 그의 의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국정원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경쟁 없는 한국식 정보 체제가 ‘정보공룡’ 국정원과 최고 권력자 사이의 ‘야합’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어 안보 관련 정보보다 국내 정보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국정원의 국내 파트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기업체 등 거의 모든 기관에 정보관을 보내 정보를 수집한다. 국정원이 이렇게 광범위한 정보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냉전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CIA, NRO, FBI, CSS, NSA
“특정 정보기관이 모든 것을 커버하게 된다면 최고 권력자는 이 기관에게 무엇을 요구하게 되겠는가. 천하의 정보기관이라고 하더라도 해외 활동에는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국내에서라면 거의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으므로 최고 권력자는 이 기관이 눈엣가시 같은 정적들을 제압해주길 기대한다. 눈치 빠른 정보기관장이라면 먼저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최고 권력자를 사로잡아 버린다. 이로써 국가 정보기관은 최고 권력자나 특정 세력을 위해 봉사하는 사설 정보기관이 되는데, 미림팀이나 DJ 시절 국정원의 도청은 이러한 구도 속에서 생겨났다.”
1972년 6월17일 미국의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들어 있는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된 5명의 사내는 정보기관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닉슨의 재선을 지지하는 세력이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그 후 FBI는 닉슨을 의식해 이 사건 수사를 불성실하게 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마크 펠트 FBI 부국장이 워싱턴타임스의 보브 우드워드 기자 등에게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나오게 되었다.
미국은 정권 바뀌어도 CIA 국장은 그대로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보기관은 정치공작에 개입하지 않았음을 증명한 케이스다. 반면 X파일 사건을 통해 한국의 국가 정보기관은 정치공작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문제는 국내정보 파트가 사고를 치면 한 몸으로 연결된 국정원의 해외 파트까지도 싸잡아서 욕을 먹고 위축된다는 점이다. 한 정보맨은 이렇게 주장했다.
“해외정보 파트는 국익 하나만을 위해 뛰는 기관이다. 그들이 국내 정치 문제나 국내 정책 문제에 개입할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국내 파트가 사고를 치면 덩달아 해외 파트까지 욕을 먹게 된다. 우리와 거래하는 외국 정보기관들은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적극적인 정보 협조를 펼치려 하지 않는다.
그들 눈에는 국가 정보기관 기관이 국내 정치 문제에 개입한 것도 한심하게 보이지만 국가 정보기관이 취득한 정보인 X파일이 국가 정보기관 직원에 의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이 더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우리보다 더욱 집중도가 높은 소련의 KGB나 중국의 국가안전부, 북한의 국가보위부에서도 그러한 유출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네가 준 정보가 새나갈 것을 염려해서라도 한국 국정원과는 적극적인 정보교류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가 첨예한 지금 한국 정보기관이 국제정보 세계에서 왕따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정보의 ‘정’자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국정원장의 사과를 계기로 “특별법을 만들어 X파일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 “X파일에는 검찰 수뇌부도 거론돼 있으니 이 사건 수사는 특검에 맡겨야 한다”는 논쟁을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정보맨은 이렇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첫 임기를 보낼 때의 CIA 국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임명된 사람이었다. 왜 부시는 CIA 국장을 그대로 유임시켰겠는가. CIA 국장은 정보 전문가의 자리지, 권력에 충성하는 정치꾼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미국에서는 확실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는 그들의 이름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X파일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놓고 특별법과 특검제로 대립하는 한심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국회가 진정으로 국익을 생각하는 기관이라면 청문회를 열어 YS 시절과 DJ 시절 국정원에서 누가 도청팀을 운영했는지부터 샅샅이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이나 정보맨이 국내 정치 문제에 개입하면 무서운 처벌을 받게 하는 쪽으로 국정원법과 국정원직원법을 개정해야 한다.”
미국 등 선진국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정보기관을 쪼갬으로써 정보를 전문화하고 있다. 정보 분야가 전문화될수록 국익은 증대된다. 때문에 국정원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대하는 정보맨들은 ‘정보공룡’ 국정원을 쪼개서 정보 분권화로 나아가라고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