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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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최선을 다한 전쟁에서 패한 죄 … ‘보이지 않는 손’에 비겁자 낙인, 밟히고 또 밟혀

  • 고정욱/ 소설가

    입력2005-05-04 12: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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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중반에 접어든 드라마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부분은 역시 라이벌이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관계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용장 원균을 비겁자이자 무모한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리고 있다”며 반론을 제기한 작가가 있다. 장편소설 ‘원균’의 저자인 소설가 고정욱 씨다. ‘원균과 이순신의 진실’에 대한 논란은 재야 역사학계의 오랜 관심사 중 하나다. 이에 고 씨의 ‘원균을 위한 항변’을 싣는다. 고 씨는 성균관대에서 문학 박사학위(국문학)를 취득했으며,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가방 들어주는 아이’ 등을 쓴 베스트셀러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이순신의 불운한 라이벌

    4월23, 24일 방영된 드라마를 보면 원균은 그저 적군 시체의 목이나 베고, 부하들의 하극상을 용인하는 겁장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일본군을 맞아 혼자 힘으로 경상우수영을 지키겠다는 무모한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도 하다. ‘원균=간신론’에 밀린 탓인지 드라마가 방영 초기와 달리, 우리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담고 있던 원균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드라마가 아닌 역사상의 인물 원균은 그렇게 비겁한 자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이도록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폄하되고 왜곡돼왔을 뿐이다.

    임진 해전은 모두 이순신이 총지휘했을 뿐 아니라 그밖의 빛나는 승전도 모두 그의 공로인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자갈 하나로 쓰러뜨린 다윗의 전설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이순신을 괴롭히고 사사건건 그를 모함했다고 하며, 일본군에게 패배한 원균 또한 일등공신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부 이순신 옹호론자들은 온갖 추정과 가설을 동원해 이를 부인하려 하지만, 역사는 증거와 사료로써 엮어지는 학문이다. 어떤 가설과 추론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역사적 증거다. 이제 우리의 통념을 역사의 증거와 사실, 더 나아가 진실의 잣대에 비추어 판단해보자.



    도망만 다닌 겁쟁이였나

    원균은 전쟁을 무서워하고 자신만 살려고 배와 군사들을 버리고 도망간 겁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원균이 경상우수사가 된 건 7년 전쟁이 발발하기 고작 두 달 전인 1592년 2월이었다. 전쟁을 준비할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원균은 거의 장부상에만 남아 있는 군사와 전함을 가지고 개전이 되자 적과 맞닥뜨려야 했다.

    작전 매뉴얼대로 쓸 만한 배를 제외하고 수리가 가능한 배들은 적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부숴버리고 일단 후퇴한 뒤, 그는 특유의 무인정신으로 일본군과의 첫 접전에서 승리를 엮어낸다.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옥포해전을 첫 승리로 알고 있지만, 원균이 그에 앞서 최초의 승리를 견인해낸 것이다. 판옥선 3척과 10여 척의 중맹선으로 이룬 놀라운 전과였다.

    원균이 이 싸움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일본의 배가 조선의 배보다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들이받기만 하면(撞破) 부숴져 가라앉는 데다가 함포의 위력에서 조선 수군이 월등했기에, 원균은 실전 경험을 통해 수적 열세만 극복한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음을 간파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원균의 이러한 경험은 그야말로 한 모금의 생명수였다. 그렇기에 원균은 자신보다 준비가 잘되어 있는 군 후배이자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연합 함대를 구성하자고 여러 차례 채근한다. 이순신은 원균의 요청에 뒤늦게 군사를 이끌고 와 연합함대를 결성한다.

    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원균과 이순신. 극이 전개될수록 원균의 용맹함은 감추어지고, 무능한 장수로 묘사된다.

    옥포해전 선봉은 누구였나

    좌우로 진을 벌이는 이순신의 판옥선은 24척이었다. 그런데 가장 앞장서 적을 향해 쳐들어가야 하는 선봉대가 된 것은 바로 실전 경험이 있는 원균의 경상우수영 배들이었다. 이순신 추종자들의 견해에서 본다면 패군지장에 도망자, 비겁자인 원균에게 선봉장을 맡겼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괴로운 대목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합함대는 원균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승리를 거둔다. 훗날 우리가 옥포해전이라 부르는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본선이고 오늘날로 치면 구축함 격인 층각선 26척을 침몰시킨다. 이순신은 자신이 직접 쓴 장계에서 원균이 5척의 층각선을, 자신의 함대가 21척의 층각선을 침몰시켰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원균이 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5척의 적선을 격파할 동안, 이순신은 24척으로 21척의 적선을 격파한 것이다.

    누가 갈등의 원인 제공했나

    5월9일, 옥포해전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두 장수는 노량에서 헤어졌다. 이때 원균은 이순신에게 싸움에서 이긴 보고서, 즉 장계를 왕에게 올리자고 제안한다. 장계가 올라가야 공로에 따라 장수들의 벼슬이 올라가고, 상이 내려지기 때문에 당연한 절차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아직 적군을 완전히 몰아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탕이 끝난 뒤 장계를 올리자고 한다. 원균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원균이 돌아가자 이순신은 모든 공을 자신이 세운 것처럼 꾸며 쓴 단독장계를 왕이 피신해 있는 행재소로 보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가 적을 무찌른 일에 관해 아뢴다’는 군공장계다. 장계를 받아 본 선조의 심정은 아마도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웠을 것이다. 그 결과 푸짐한 포상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으로 내려갔음은 물론이다.

    훗날 이를 알게 된 원균이 반발하고 배신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후 원균 역시 단독으로 그간 있었던 전과를 소상히 적어 장계를 올린다. 그러나 첫 승리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이순신이 받은 뒤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갈등과 불신, 경쟁과 반목으로 급전하게 된다.

    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경기도 평택에 있는 원균 사당.

    혼자서 공을 세운 것처럼 쓴 단독장계를 보낸 일은 훗날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기 직전까지 가게 하는 ‘남의 공을 가로챈’ 죄가 되고 만다(선조실록 30년 3월13일).

    그 후 해전에서 이순신은 용맹한 원균의 전투력이 껄끄러워 의도적으로 그를 따돌리기 시작한다. 원균 처지에서는 배의 수가 적으니 단독 작전을 할 수도 없고, 선봉장을 시켜주지 않으니 앞장서 싸울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더욱이 부하들을 챙겨주지 못한 어리석은 지휘관이 되었다는 자책감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원균은 전투의 핵심에서 밀려나 할 수 없이 적의 목이나 베어 부하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자신을 찬밥신세로 만드는 이순신에 대한 일종의 압박 카드이기도 했다. 앞에 세우자니 너무 용맹하고 뒤로 빼자니 수급을 챙기고…. 이순신의 답답한 심정은 당포해전 장계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군대든 적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용장(勇將)인 원균과 지장(智將)인 이순신의 스타일 차이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난중일기’에 그려지는 원균의 무도함과 행패는 아마도 원균이 느낀 배신감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가장 주관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글인 이순신의 일기를 통해 그의 라이벌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범해온 게 사실이다.

    원균은 왜 패배했나

    전쟁이 지루하게 수년째 이어지자 이순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저질렀던 실수가 점차 죄목으로 쌓여 선조는 그를 벌주라는 빗발치는 상소를 받게 된다. 결국 이순신은 수군통제사 직에서 밀려나 한양으로 압송되니, 후임에 원균이 앉게 된다. 군 후배의 자리에 선배가 앉은 꼴이었지만 원균으로서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소원이던 일본군 일망타진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부산포에 칩거한 적을 치는 일은 중간 기착지인 다도해의 수많은 섬이나 육지에 잠복한 일본의 첩자들을 소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도와야 할 도원수 권율은 수군 혼자 치러 갈 것이지 육군에 핑계를 대느냐며 오히려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치며 출동 명령을 내린다. 부하들 앞에서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수군 단독 출정을 결정했다. 이 사실을 육지의 첩자들을 통해 낱낱이 들은 일본 수군의 준비된 ‘카운터펀치’가 바로 칠천량해전이었고, 결과는 대참패였다.

    원균의 패배에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으니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바로 밑 부하 장령들이 모두 이순신의 심복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원균이 자신들의 대장을 밀어냈다고 여겨 원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한마디로 원균은 왕따를 당한 것이다. 이는 이순신이 전라도로 백의종군을 갔을 때 임지를 지켜야 할 많은 부하들이 찾아가 원균의 흉을 보며 배반을 꿈꾸는 장면으로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수군의 궤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원균 말살의 400년 잔혹사

    원균이 죽고, 이순신이 복귀해 마지막 승리를 낚은 뒤 길었던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이순신 역시 석연치 않은 죽음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두 라이벌이 함께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공훈과 시호를 내리니 충무공은 이순신, 충정공은 원균이다.

    그럼에도 왜 원균만 그토록 후안무치한 ‘간신’으로 우리들의 뇌리에 인식되었을까. 필자는 이를 ‘원균의 400년 잔혹사’라고 말하고 싶다.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이 원균의 패전만을 들춰 그를 비난하자, 선조는 그를 지용인(智勇人)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원래 영웅은 성패만을 가지고 논하는 법이 아니라며 충신 원균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후대에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인 인조반정으로 이식이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그를 포함해 정권을 잡은 사대부들은 과거 정적들이 이미 쓴 선조실록을 선별적으로 개찬(改纂)하여 ‘수정실록’을 만들었다. 그 신흥 사대부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식은 덕수 이씨로 이순신과 한집안 사람이기도 하다.

    애초의 의도는 ‘선조실록’ 가운데 잘못된 사실과 누락된 부분을 수정, 보충한다는 것이었지만 1641년(인조 19)부터 시작된 작업을 이식이 전담하면서 이순신의 라이벌이었던 원균은 철저하게 그의 붓끝에 의해 다시 죽는다. 후세의 정치놀음에 의해 원균은 비겁자로 거듭났고, 이로 인해 선조수정실록은 앞뒤가 안 맞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아지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었다.

    그러나 결정타는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춘원 이광수가 날린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신문 연재소설인 ‘이순신’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라는 허울로 우리 민족의 하등함과 비열함을 드러냈다. 선조를 비롯한 무능하고 썩은 벼슬아치들의 당파싸움이 고결한 영웅 이순신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식민사관에 뿌리를 둔 것으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민족의 영웅까지도 외롭게 만들고 벌주는 한심한 족속이니,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만고충신 勇將 역사는 왜 그를 버렸나

    옥포해전은 원균이 승전으로 이끈 전투다.

    이 작품을 읽으면 독자들은 결코 일본군을 적으로 여기게 되지 않는다. 이순신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선조와 조정의 관리들, 그리고 원균만이 미울 뿐이다. 여기에서 원균은 이순신을 괴롭히는 무능하고 간특한 악역으로 전락한다.

    불행하게도 왜곡의 끝은 거기가 아니다. 그 완성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오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그는 이순신의 삶에 감동받는다. 어쩌면 군인으로서 멸사봉공의 삶을 산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이순신을 성웅으로 둔갑시키고, 국민들이 숭앙할 존재로 신격화한다. 40, 50대의 중년이라면 학창시절 이순신 영화를 단체 관람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충무공 탄신 기념일이면 대학교, 고등학교 학생회 임원인 학생들은 군장을 하고 아산 현충사까지 도보행진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작품집 번역 발간, 현충사 성역화, 난중일기 국보 지정, 탄신일 기념, 국가적 제사, 동상 건립 등을 통해 박정희는 국민의식을 개조하려 했다. 이 와중에서 원균은 성웅을 괴롭힌 만고의 비겁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원균의 미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기획 의도는 이순신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 승리를 이끌었던 지도자며, 그의 삶은 오늘날의 우리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했다. 애국심과 용기, 불굴의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개혁 의지로 부하들을 이끌었던 이순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 상인지도 모른다.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원리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 사람인 데다가, 구습을 과감히 타파하고 철저한 준비와 개혁 의지를 가졌다는 점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이순신이 구국의 영웅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 왜곡의 빌미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가공의 상상력이 가미된 드라마일지라도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면 역사의 진실에서 너무 벗어나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영웅 이순신을 부각하기 위해 또 다른 영웅 원균을 간신, 비겁자, 패군지장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이순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최선을 다한 전쟁에서 졌다는 것뿐이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다. 그리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원균이 논쟁의 중심에 떠오르는 것을 환영한다. 국사 교육이 등한시되고, 주변국이 부단히 과거 역사를 왜곡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 모든 논의는 분명 역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원균을 다시 보려는 노력이 드라마를 계기로 시작되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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