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석상
언제 무슨 까닭으로 ‘용호석(龍虎石)’이 이곳에 세워졌을까?
“공민왕이 홍건적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이곳의 훌륭한 명당 터를 보고 자신의 능 자리로 잡아뒀는데,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돌아가고 나서는 그대로 방치했다는 전설을 어려서부터 들었다”고 주민 황운학씨(70)가 전해준다.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공민왕이 안동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금산까지 들렀다는 기록이 없어 ‘용호석’에 대한 진실은 가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용호석’의 조성 시기를 고려 말이나 조선 초로 추정하고 있고, 또 용호석이 매우 세련된 예술품임을 감안하면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호랑이 석상
역사에서 패자는 늘 나쁜 점이 부각돼 전해진다. 고려 공민왕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왕으로 재위하고 있을 때 시해를 당한 것도 그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고려를 멸한 조선이 ‘고려사’를 다시 쓰면서 그의 좋은 점들을 일부러 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나쁘게만 서술되지 않은 것을 보면 공민왕은 대단한 인격과 능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원나라 노국 공주와 결혼한 뒤 왕이 되어 귀국한 공민왕(생존 1330∼74, 재위 1351∼74)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한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원나라 기황후(주간동아 440호에 소개)를 등에 업고 설치던 기철(奇轍) 등 친원세력을 제거해 왕권 회복을 꾀하고, 원나라에 점령당한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아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또 승려 신돈(辛旽)을 내세워 권신들을 축출하고 신진사대부를 등용했으며, 토지의 재분배를 시도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시해를 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혁명에 가까운 개혁정치를 시도한 공민왕은 풍수지리를 하나의 개혁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의 풍수 실력은 당대 최고였다(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의 평).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 토목공사, 사랑했던 왕비 노국 공주의 무덤터 선정과 단장, 개경의 지기가 쇠했다는 이유로 세운 평양 및 충주 천도 계획 등에서 풍수 식견을 엿볼 수 있다. 평양이나 충주로 천도를 꾀한 이유는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약화해서 개혁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양과 충주 두 곳만을 천도 후보지로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도읍지를 위해 전국의 좋은 땅을 수소문하거나 해당 관리를 시켜 찾아 다녀보게 했을 것이다.
‘용호석’ 뒤의 혈처로 추정되는 천내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