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소시민 김건식씨는 우리 사회의 부당한 관행에 맞서 싸우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고, 결국 ‘부당하게 더 낸’ 치료비 10만6641원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다. 자신처럼 피해를 당하고도 돈을 더 낸 줄조차 몰랐던 다른 환자 1000여명의 권리까지 찾아줬다. 대형병원의 부당한 선택진료비 징수문제를 공론화한 김건식씨(57)다.
김씨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산다. 하지만 ‘자곡동’ 하면 떠오르는 고급주택 단지와는 거리가 멀다. 고가의 저택 거리를 지나 외길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비로소 그가 사는 단층 슬래브 집이 나온다. ‘강남 속의 깡촌’이다.
생업 접고 1년 6개월 매달려 단돈 10만원 받아내
김씨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은 종견을 키워 애완견 교배시켜주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깊이 패인 주름살과 검게 그을은 얼굴,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을 한 그는 ‘가방 끈’도 짧다. 중학교를 1학년 때 중퇴한 후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부도 명예도 번듯한 학벌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촌사람’. 그게 바로 김건식씨다.
그런 김씨가 여러 해 동안 ‘부당한 진료비’를 받아 챙겨온 대형병원을 상대로 혼자 싸움을 벌여 결국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을 두손들게 만들었다. 그를 강하게 한 무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부당한 것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조건적인 열정’이다.
“젊은 시절부터 고질적인 허리 병이 있었어요. 동네 작은 병원들을 전전하다 2002년 10월에 A병원이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지요. 그런데 진료를 받고 보니 영수증이 이상한 거예요. ‘선택진료비’라는 항목이 있고, 모든 비용이 급여와 선택진료비 두 개씩 계산돼 있더라고요. 일반 병원에서는 없던 비용이라 처음에는 이게 뭔가 물어보는 데서부터 시작했지요.”
김씨가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들추며 한 가지씩 설명을 시작했다. 궂은일에 단련된 그의 뭉툭한 손끝 아래로 병원 영수증, 각종 법조문, 온갖 기관과 주고받은 내용증명들이 스쳐 지나갔다. 1년 5개월 동안 생업을 미뤄가며 직접 준비한 싸움의 증거물들이다.
처음 김씨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 선택진료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의했다. 그 비용이 자신이 선택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왜 직접 의사를 선택하지도 않은 방사선, 주사, 혈액검사에 대한 비용에까지 선택진료비가 부과됐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러나 심평원도, A병원도 그 이유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제가 선택한 의사는 제 허리를 봐줄 선생님뿐이었어요. 그 분이 직접 X-레이를 찍거나 주사를 놓지도 않았는데, 나머지 비용까지 모두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지요.”
그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김씨는 보건복지부에 A병원을 고발했고, 복지부 조사결과 이 병원에서만 1000여명의 환자가 이런 방식으로 2900만원의 비용을 초과 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A병원은 결국 이 피해자들 가운데 희망자 모두에게 부당하게 받은 선택진료비를 환불해줘야 했다. 올 3월의 일이다.
대형병원과 싸우기 위해 직접 준비한 자료들을 보여주는 김건식씨.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지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괜히 나서서 싸우면 자기만 피곤해진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겠죠.”
잘못된 일 못 참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사람’
김씨의 말처럼, 김씨는 이번 싸움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1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그가 들인 비용은 서류 준비와 내용증명 발송 등 직접적으로 쓴 돈만 따져도 100만원이 넘는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실력으로 대형병원을 상대해 법률 싸움을 벌이느라 생업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것까지 감안하면, 싸움은 수익의 100배가 넘는 손실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씨의 ‘외로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은 사람은 김씨 자신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환자들이다.
그러나 김씨는 이런 결과에 대해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부당한 것을 고치기 위해 나서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모범적이어서 오히려 신뢰가 가지 않는 김씨의 이 말을 믿게 하는 것은, 지금껏 ‘정의’를 위해 만만치 않은 상대와 숱하게 싸워온 그의 이력이다.
사실 김씨는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원히 철들지 않는 사람’으로 불린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싸움이라도 절대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9년에는 김씨가 농장에서 키우던 개가 동물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바로 죽은 일이 있었다. 수술 과정에서의 과실이 분명한데도 수의사는 “주인의 관리 소홀로 개가 죽었다”며 보상을 일절 거부했다. 의료 지식이 전혀 없는 김씨가 몇 번 항의하다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충무로 동물병원을 오가며 전문지식을 익혔고, 수술 과정의 허점을 지적하는 다른 수의사들의 진술을 이끌어냈다. 수의사와 김씨 사이의 다툼은 소송으로까지 번졌지만, 결국 수의사는 애견 잡지에 수술 잘못을 시인하는 공식 사과문을 게재해야 했다.
김씨는 “분명히 잘못된 처치를 하고도 의료 지식이 없는 개 주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부 동물병원의 부도덕한 관행을 바로 잡기 위해 잡지에 대형 사과문을 실으라고 했다. 그 전에 피해를 당했을 다른 주인들이 나처럼 문제점을 지적했다면, 그 수의사가 그렇게 뻔뻔하게 과실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농협에서 빈 병을 교환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하다 끝내 병을 받아주지 않자 농협중앙회장에게 직접 항의 편지를 보내 공식사과를 받아낸 일도 있다. 젊은 시절 한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의 가맹점을 운영했을 때는 본부가 영업점의 수익률을 부당하게 책정했다는 것을 알고 대표의 공식사과를 받아냈고, 농지 매매 과정에서 급행료를 요구하는 공무원을 고발하기도 했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부당한 관행과 싸웠다. 정작 자신에게는 크게 남는 것이 없는, 어찌 보면 피곤할 뿐인 일에 대해서도 말이다.
김씨는 올 4월 A병원을 상대로 “부당한 진료비를 환불받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다”며 손해배상금 1000만원을 요구하는 ‘나 홀로 소송’을 냈고, 7월12일 법원으로부터 화해 권고를 받은 상태다. 하지만 조용히 화해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대형병원들이 지금까지의 부당한 관행을 솔직히 시인하고, 아직도 선택진료비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식사과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끈질긴 이들이 늘어나야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당연한 듯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그를 버티게 한다.
“저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돈도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대한 상대라도 ‘진실’은 꺾을 수 없어요.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지레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살 만한 곳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