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청와대에서 자리를 함께한 노무현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들.
벌떡 일어난 SK 최태원 회장은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소로 화답했다. 5월25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노대통령과 15개 그룹 총수 및 3개 경제단체장 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최태원 회장의 ‘기립 사과’는 예정에 없던 일. 총수들은 앉은 채 ‘3분 스피치’를 통해 노대통령에게 건넬 투자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최회장 차례가 되자 당초 사과만 한다던 계획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온몸으로’ 깊이 사죄의 뜻을 표한 것이다.
최회장의 곡진한 사과는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강신호 회장도 “누구 한 사람이 화끈하게 나서니 다른 사람 맘이 편하더라”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최회장의 사과와 노대통령의 수용, 총수들의 안도와 ‘선물 공세’는 이 모임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대통령이 나서 총수들에게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 대한 면죄부를 줘 기업 활동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 삼성·LG·현대자동차·SK 등 4대 그룹 총수들은 5년간 162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약속으로 이에 화답했다.
화기애애한 간담회 분위기는 5월27일부터 시작된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강철규 위원장과 재벌 총수들 간의 릴레이 면담으로 이어졌다. 강위원장은 LG 구본무 회장과 만나서 ‘5%룰(지주회사의 자회사 외 회사 지분 보유를 5% 이내로 묶는 것)’ 완화를, SK 최회장에게는 소버린에 의한 적대적 M&A 방지를 위해 ‘외국인 1인’ 범위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핵심인 그룹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문제도 ‘2006년부터 3년간 단계별 축소’로 한참 후퇴했다.
그렇다면 이제 참여정부와 재벌그룹 간에도 드디어 밀월 무드가 조성된 걸까. 앞뒤 정황을 따져볼 때 ‘진짜 힘겨루기는 이제부터’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4대 그룹이 약속한 투자 활성화의 내용 및 실현 가능성 또한 신중히 따져볼 일이다. 이벤트는 이벤트일 뿐, 노대통령과 재계는 각자 기대한 만큼의 수확을 거뒀으되, 국민에게까지 과실이 돌아올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불법 정치자금 면죄부에 투자 이벤트로 화답
각 그룹이 청와대 회동 참석을 통보받은 시점은 5월16일쯤이었다. 청와대 측은 간담회의 목적을 “대통령이 직접 기업의 실질적 의사 결정권자에게서 투자계획을 듣고, 그것이 차질 없이 집행되려면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투자 활성화, 일자리 창출이 주제인 만큼 그에 걸맞은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 회동과 관련해 가장 긴장한 쪽은 삼성과 SK였다. 삼성은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의 에버랜드 CB(전환사채) 변칙 상속 건이 재판에 계류 중인 데다, 오래 전부터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재벌개혁 1차 타깃으로 지목돼온 형편. 최근 들어서는 대통령이 강도 높게 비판한 ‘경제위기론’ 유포의 한 축으로까지 인식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삼성 출신인 전경련 현명관 부회장이 이화여대 특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는 가라, 한국식 경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삼성경제연구소 정구현 소장이 서울대 특강에서 “공정위와 검찰이 너무 설쳐 재계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편 것 등이 특히 문제가 됐다. 현부회장은 이 발언으로 인해, 그간의 관례와 달리 간담회 참석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2월 참여연대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불법 정치자금 제공 기업인에 대한 엄정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간담회에서 4대 재벌을 중심으로 한 재계는 각종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의 경우 △삼성 16조5000억원 △LG 9조4000억원 △현대자동차 5조8800억원 △SK 4조원 △포스코 2조8000억원의 투자를 약속한 것. 그러나 언론의 떠들썩한 보도와 달리 알맹이는 별반 없는 발표였다.
공정위 유화적 움직임 경제개혁 단체 거센 반발
전경련 회장단은 1월19일 노대통령과 함께한 오찬 간담회에서 “올해 총 46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 당시를 기준 삼을 때 추가 투자라 할 수 있는 것은 삼성 1조9000억원, LG 4000억원, SK 5000억원 정도다. 다른 그룹들은 현대자동차처럼 “올 초 마련한 투자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거나, “3~10년 동안 얼마를 투자하겠다”는 식의 중장기 계획을 제시하는 선에서 입을 맞췄다. LG 관계자는 “수조원에 이르는 투자계획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련하나. 이미 계획하고 있는 내용을 보완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다른 그룹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론 간담회 자리에서의 투자 발표가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투자계획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앞에서 총수가 한 약속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실제로 각 그룹은 간담회 후 자사 담당 국가정보원 직원을 통해 청와대 측에 따로 세부계획서를 제출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한 4대그룹 임원은 “정부에서 실행 여부를 감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삼성처럼 ‘연구개발에 투자하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일 땐 무슨 수로 스크린하느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재계 모두 간담회 결과에 만족을 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와대는 재벌의 ‘군기’를 잡은 데다, 앞으로도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은 사실에 무게를 두는 듯하다. 무엇보다 “경제위기 때문에 투자를 할 수 없다”고 버텨온 재계로부터 “앞으로 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점에 흡족해하고 있다. 재계로서는 우선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을 수확으로 꼽을 만하다. 대통령에게서 기업도시 건설 등과 관련한 규제 완화 및 협조 약속을 받아낸 점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만족스러운 일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후퇴와 강위원장의 ‘민원’ 해결 약속일 것이다.
공정위 움직임과 노대통령의 의중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는 없는 일. 그런 뜻에서 청와대 모 인사의 “노대통령이 (여론을 고려해) 말은 좀 심하게, 그러나 (오너 입장에선) 매우 고마운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하려 노력 중”이라는 언급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상황이 이런 만큼 경제개혁 세력의 반발은 날로 커지고 있다. 참여연대의 한 핵심 인사는 “껍질뿐인 투자 약속에 혹해 너무 많이 양보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더니 ‘재벌하기 좋은 나라’로만 가려는 거냐”며 “입으로만 하는 개혁이 결국 노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 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대까지 형성됐다고는 볼 수 없다. 지금은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서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구사하며 내공을 겨루는 상태. 결국 핵심은 ‘오너의 경영권 사수와 성공적 2세 승계’다. 누군가 “이것이 투자 확대와 직결된 사안이냐”고 묻는다면, 노대통령은 고개를 가로젓고 재벌은 “확실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한 재계 인사는 “노대통령이 우려하는 만큼 과격한 방식으로 경제개혁에 나서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재계가 지나친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정위를 과도하게 공격하거나 사안에 대해 너무 날카로운 각을 세우는 것은 자제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힘겨루기 와중에 ‘연출된’ 재계의 생색내기 선물 공세와 정부의 화답성 규제 완화는 아무래도 뒷맛이 씁쓸하다. 경기회복과 경제개혁을 둘러싼 갈등과 혼란, 책임 미루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