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재·보선을 앞두고 제주시 동문시장을 찾아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맨 왼쪽).
또 하나 결정적인 원인은 ‘민생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공표와 달리 주요 경제현안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점이다. 특히 선거가 임박해 터져나온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논란은 우리당의 개혁노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최근 각종 경제현안에 대한 우리당의 인식과 해법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일단 겉으로 드러나 있는 쪽은 전직 관료나 기업체 CEO 등 시장파가 장악한 정책 라인이다.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홍재형 정책위의장, 현대자동차 사장 출신인 이계안 제2정책조정위원장,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안병엽 제3정책조정위원장 등이 포진해 있다. 반대편에는 젊은 초선의원들이 주축이 된 개혁성향의 소장파가 있다. 낮은 선수와 경제분야 비전문성으로 인해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하고 있으나, 당의 색깔과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주류’라 할 만하다.
양자 사이에서 정책적 균형을 잡는 역할은 신기남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 등 개혁파 중진들이 할 일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은 분명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논란은 이러한 우리당의 정책결정 구도와 그로 인한 갈등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6월1일 우리당은 건설교통부(이하 건교부)와의 당정협의에서 전용면적 25.7평 이하 주택에 대해 원가연동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당 총선공약인 분양원가 공개를 폐기함을 뜻한다. 이 같은 당정협의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정책 라인의 홍의장과 안위원장이었다.
발표가 나자 시민단체들은 ‘공약 백지화’를 공격하고 나섰고, 네티즌들 또한 건교부와 우리당 홈페이지에 ‘과반 의석을 갖고 보니 배가 부르냐’ ‘당의 개혁성은 어디로 갔느냐’는 비판의 글을 무더기로 올렸다.
당 지도부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3일 오전 신의장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건교부와 한 당정협의 내용에 대해 일부에서 개혁 후퇴라는 비판 여론이 있다”며 “이는 충분히 근거가 있고, (분양원가 공개가) 공약이라면 합리적 이유나 절차 없이 바꿀 수 없다”고 못박았다. 또 “개혁을 추구하면서 시기나 완급 조절은 가능하지만 원칙을 저버리는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는 사실상 홍의장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천대표도 홍의장을 불러 “의원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보니 87%가 분양원가 공개에 찬성하는데 이를 무시할 수 없다”며 에둘러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보선 참패는 갈팡질팡 행보 실망의 결과?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싼 혼선이 이어지자 우리당 내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개혁파의 한 중진의원은 “경제 이슈와 관련한 불협화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정책위의장을 교체해야 한다거나 담당자를 문책해야 한다는 강경론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반면 홍의장 측은 “(우리당이)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소장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건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이다. 개혁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인데 왜들 공격부터 하고 나서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안위원장도 “좌우간 좋은 수단을 동원해 주택값 안정을 이루는 것이 목표 아니냐. 분양 공개를 신중히 추진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원가연동제라는 걸 그날 처음 봤지만 장점이 있더라. 아파트라고 100% 분양되란 법은 없으니 원가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기획원 시절 부동산종합대책을 많이 세워봐서 안다”고 주장했다.
사실 분양원가 공개 파문 이전에도 우리당은 경제정책 결정과 관련해 이런저런 내부 갈등을 여러 차례 겪었다. 논쟁의 중심에는 늘 홍의장이 있었다.
홍의장은 5월12일 재정경제부와의 당정협의에서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그룹사 소속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방침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해 파란을 일으켰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또 다른 핵심인 출자총액제한에 대해서도 김진표, 강봉균 의원과 더불어 ‘폐지 내지 개선’을 주장했다. 부유세 신설 역시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으며, “투자 활성화를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소장파 의원들도 처음에는 이에 동조하는 듯했다. 이광재 의원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보다 실질적 실용노선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의 대표적 개혁론자인 유시민 제5정책위원장 또한 다른 인터뷰에서 “기업의 수익 전망이 불확실한 게 문제다. 정부와 기업이 실용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 주목받았다. 천대표야말로 추경예산 편성에 적극 나서는 등 홍의장과 보조를 잘 맞춰나갔다. 그런데 분양원가 공개 문제를 계기로 숨어 있던 갈등이 표면화하고 만 것이다.
유시민 위원장은 “대기업의 투자에 구체적 걸림돌이 있으면 치워줄 수 있다, 논거를 제시하면 얘기해볼 순 있겠다는 것이 내 이전 발언의 취지였다”며 “그런데 출자총액제한제 및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과 투자 간에는 아무 관계도 없더라. 사례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고 일축했다. 애초 제시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문제는 홍의장이 주도한 당정협의에 따라 ‘2006년부터 단계별 축소’라는 형태로 한참 후퇴한 상태. 이에 대해서도 유의원은 “입법사항인 만큼 더 논의할 여지가 있다. 아직 끝난 얘기가 아니다”라고 말해, 국회에서 반대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개혁 인사 경제 모르고 전문가는 개혁 못 믿어
상황이 이런 만큼 우리당의 ‘공통된 경제인식과 해법’을 찾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당의 몇몇 의원들에게 “당 경제정책 생산의 구심점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속시원한 답이 안 나왔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초선의원은 “천대표가 취임할 당시 ‘이젠 당이 정부를 끌고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계속 재정경제부에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라며 답답해했다.
한 재계 인사는 “개혁적 인사들은 경제에 대해 모르고, 경제전문가들은 보수적이다. 전문가에게 맡기긴 해야겠는데 그들의 개혁성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우리당의 딜레마”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국회 상임위원회를 배정하면서 우리당은 정무위, 과학기술정보통신위 등 경제 관련 상임위는 지원자가 부족하고 통일외교통상위에는 지나치게 많이 몰려 배정에 애를 먹었다. 경제전문가를 자처할 만한 의원이 그만큼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의원들은 하나같이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안위원장은 “아직 상임위 구성도 되지 않았다. 17대 국회가 안정되고 나면 당내 혼란도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의장 측도 “정책 입안 전 토론을 거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등이 많다기보다 그만큼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쪽으로 봐달라”고 주문했다. 유시민 위원장은 “우리당의 색깔은 자유주의다. 지금은 결론 도출을 위해 갑론을박하는 상황일 뿐 장기적 혼선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모두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호황 속 불황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마냥 기다릴 시간도, 인내심도 없다. “경제가 좋은데 웬 개혁이냐, 경제가 어려운데 개혁을 미루어야 한다는 식의 근시안적 주장을 해온 경제관료들은 안정과 성장 중 하나라도 얻은 것이 있는지, 경제가 살아났는지를 자문해야 한다”는 고려대 장하성 교수의 일침은 우리당 의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