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정 연못
여름 숲은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걸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본 적이 언제인지 가물거립니다. 6월은 꽃바람이 잦아드는 대신 나뭇잎의 빛깔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달입니다. 여름 숲을 맨발로 걷다 보면 소나무의 송진냄새와 송화내음, 그리고 전나무의 바늘잎에서 샘솟는 톡 쏘는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물기를 흠뻑 먹은 흙냄새는 덤이고요.
서울 도심에도 비를 흠씬 맞으며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간질거리는 감촉이나 발부리에서 올라오는 짜릿한 촉감에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숲이 있습니다. 꼭 비가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푹푹 찌는 날이라면 알맞게 달구어진 숲 속에 숨어 있는 온몸을 감아도는 제철의 습한 기운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축축하면서도 시원한 바람과 발샅을 타고 퍼지는 감촉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비원으로 알려진 서울 도심의 ‘창덕궁 후원 숲’(이하 후원)은 보고 싶다고 해서 어느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가고 싶다고 해서 어느 땅이나 밟을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만, 허락된 곳만 거닐어야 하는 부자유마저도 상쇄할 만큼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숲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정자·연못·나무들의 환상 어울림
태극정
존덕정
다행스럽게도 5월부터 후원에서 숲 향기 숲 소리 숲 빛깔을 즐기며 맨발로 비를 맞으면서 걸을 수 있는 곳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연경단 선향제를 돌았던 옛 숲길에 더하여 옥류천 존덕정 폄우사 관람정을 거쳐 애련정으로 내려오는 후원의 비경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원은 부용지에서 시작합니다. 뒤편 2층 누각은 정조 때 도서관으로 쓰인 주합루라고 하지요. 앞쪽으로 작은 섬에 소나무가 자라는 연못이 있는데, 연못 위로 부용정과 주합루가 살금살금 흔들립니다. 목탁 두드리듯 청아한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바람과 나무가 만든 숲 소리와 어우러져 상쾌합니다.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올라오는 흙의 감촉은 새롭습니다. 숲이 깊어질수록 흙 냄새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맨발로 천천히 굽이 길을 돌아 나서면 호리병 모양의 관람정이 모습을 드러내지요.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가 싶으면 정자가, 정자를 넘어서면 다시 숲이 자태를 드러냅니다. 춘당대를 지나면 작은 돌문인 불로문을 만날 수 있고 불로문 뒤로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책을 읽었다는 가오헌이 터를 잡았습니다.
농산정
후원 오솔길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은밀한 곳입니다. 바위를 파서 샘을 만들고 산의 물줄기를 당겨 흐르게 했지요. 사람의 때가 닿지 않은 바위는 푸른 이끼에 몸을 맡겼습니다. 옥류천을 에워싼 정자 틈새로 불어오는 숲 바람은 몸에 걸친 옷마저 가볍게 합니다. 통째로 죽었던 두 발이 이제야 다시 살아나 비로소 숨을 토해내는 것 같습니다.
Tips | 후원 가는 길
옥류천의 숲 바람을 맞으며 후원 길을 걷고 싶다면 예약하고 정해진 날짜에 창덕궁으로 가면 된다. 창덕궁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걸어서 5분,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에서 10분가량 걸린다. 오전 10시,
오후 1시, 2시에
출발하는 코스가 있는데 왕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예약은 창덕궁 홈페이지 www.cdg.go.kr에서 할 수 있는데 6월 초순까지는 시스템 정비로 예약을 받지 않는다.
취한정
취한정에서 본 소요정
숲이 만드는 소리 중에서 솔숲이 만드는 소리는 격이 다르다.
영혼을 깨우듯 숲 전체가 울리는 ‘쏴아~’ 하는 소리는 장엄하다.
솔숲이던 이곳에 넓은잎나무가 넘어 들어와 다른 소리가 섞이는 게 흠이지만, 조상들이 왜 솔숲에서
태교를 했는지 가르쳐준다.
비 오는 날 맨발로 흙바닥을 밟는 기분은 새롭다.
소요정을 끼고 계곡에서 흘러내려 휘돌아나가는 옥류천을 볼 수 있는 것은 ‘비 오는 날’뿐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정가에 흐르는 맑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는 것으로 대신하면 된다.
후원엔 딱따구리 원앙 소쩍새 등 40여종의 새가 서식하고 있다.
나무와 바람이 만드는 숲 소리에 어우러진 새 울음소리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숲이 만드는 소리는 지친 뇌를 쉬게 해주는 보약이라고 전한다.
취규정은 새로 열린 숲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다.
정자 아래로 보이는 숲은 초록의 바다를 이룬다.
녹음이 깊어진 넓은잎나무가 만드는 ‘바다’는 무표정한 것 같으면서도 하루하루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