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 문제로 궁지에 몰렸다.
△독일 슈테른지가 독일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 사진이 공개된 이후 독일 내에서 반미 정서가 높아지고, 응답자의 75%가 부시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5월19일 이란의 테헤란 혁명광장에서 10만여명의 시민들이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난하며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영국대사관 앞에서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국기를 태우고 대사관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이라크 포로학대 문제가 불거진 뒤 전 세계적으로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이라크 등 이슬람 국가뿐 아니라 남아공, 독일, 프랑스, 쿠바, 한국 등 예외가 없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 미국은 지금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강력하게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세계 인류의 평화를 지키는 유일 강국의 이미지’를 지켜왔던 미국이 왜 이런 상황에 내몰렸을까. 이런 변화가 단지 포로학대 문제만으로 초래된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반미의 진원지 이라크의 분위기는 그 일면을 짐작케 한다.
이라크는 지금
“미군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한 달 동안 이라크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민족21’의 강은지 기자는 현지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미군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가는 바로 총알이 날아올 만큼 미군들이 자기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라크 무장세력들의 항거가 거세다는 뜻이다. 미군과 함께 있는 것도 오히려 무장세력의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게 강기자의 얘기다.
“이라크 사람들에게 미군,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미국이 싫다’며 적대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미군의 통제와 헬기소리 같은 전쟁 소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족이나 친지 가운데 미군에 의해 죽거나 수용소에 가 있는 이가 한두 명은 꼭 있기 때문에 정서적 거부감은 상당히 높았습니다.”
지금 미군에 대해 적대감정을 드러내는 이들 가운데는 후세인 정권 하에서 고통받았던 이들도 적지 않다. 전쟁 초기 미군의 진주에 박수를 보내며 환영했던 이들이다.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반전 여론이 형성돼갈 때도 전쟁밖에 방법이 없다면 후세인 정권을 하루빨리 없애달라고 했고, 후세인만 제거된다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고 여겼던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라크 내의 반미 여론은 지난해보다 훨씬 높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는 장면.
이라크인들이 미군에 대해 적대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이 이라크의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 상황을 개선하려면 정치적 해법에 앞서 미군으로 하여금 이라크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격파로 알려진 무자헤딘 전사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이고, 정치적 판단보다 종교적 문화적 판단이 앞서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미군이 자신들의 사원을 공격하고 코란을 무시해 불명예를 당했을 때 복수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한 불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피의 보복이 반복되는 겁니다.”
5월14일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수용된 가족과 친지를 만나기 위해 몰려든 이라크 사람들.
그러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갇혔다 풀려난 이들은 지난해부터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지난해 10월 국제적십자사가 수용소에 조사단을 파견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군에 잡혀가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미군은 임시행정처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2주일이면 충분히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잡혀간 가족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수용소나 미군기지 주변을 맴돌며 가족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이슬람 무장단체가 미국인 개인사업가 니컬러스 버그를 살해하기 직전의 모습.
도덕적으로 타락한 미국
“미국은 훨씬 더 바보스러워졌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1989년부터 99년까지 미국에서 공부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1960년대의 미국과 지금의 미국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60년대 베트남전쟁 때는 미국 내 양심세력의 목소리도 높았고, 반전평화운동도 거세게 일었지만 지금은 너무 다른 분위기라는 것이다. 한교수는 포로학대 문제가 드러난 뒤에도 미국사회의 분위기가 크게 반성적이지 않다는 데 놀라고 있다. 예컨대 미국 주류 언론이 이번 사건을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로 보기보다는 몇몇 비행 사병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미국 사회의 도덕성이 그만큼 타락했다는 것이다. 또 미국 주요 신문들은 CBS에서 보도한 포로학대 문제를 취재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다음날 조간에 보도하지 않고 그 다음날 다뤄 의혹을 샀고, CBS 역시 2주 전에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정부의 요청으로 방송을 미루다 타 언론사에서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보도했다.
5월11일 니컬러스 살해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가족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목이 잘려 무참히 살해당한 미국 민간인 니컬러스 버그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가 5월13일 펜실베이니아 자택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심지어 “내 아들은 부시와 럼스펠드가 저지른 죄 탓에 죽었다”며 자신의 정원에 “전쟁은 답이 아니다”는 팻말을 세웠다. 미국사회의 변화상을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일화 아닐까.
부시 행정부는 애초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학살무기가 존재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시인했으면서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고 있고, 800여명이 죽은 팔루자 민간인 학살과 수용소 포로학대 사건 등으로 국제법을 어겨왔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는 지금의 비난여론은 단지 이라크 전쟁 때문에만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지배적 패권주의 성향을 내보이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자국의 이익, 특히 군산(軍産)복합체와 전통적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상대국의 이익이나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특히 부시 행정부는 지구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요한 교토기후협약의 조인을 미뤘고, 구 소련과 맺은 탄도요격미사일협정(ABM)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또 클린턴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로마헌장에 서명한 것을 철회해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세계 유일 최강국이다. 어떤 이는 바로 여기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읽어낸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74)은 자신의 책 ‘미국 패권의 몰락’에서 미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진정한 힘을 결여한 외로운 초강대국, 추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존경하는 사람마저 거의 없는 세계의 지도자, 그리고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전 지구적 혼돈의 와중에서 위험스럽게 표류하고 있는 나라.’
월러스틴이 미국의 패권이 파탄 났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미국만이 세계에 대해 우월한 미덕을 지니고 있고, 다른 곳보다 더욱 문명화돼 있다는 뿌리 깊은 독선과 오만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진짜 문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기울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국이 세계와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손상만을 보고 우아하게 하강하는 길을 찾느냐 아니냐인 셈이다”고 꼬집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