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을 신봉했던 광해군의 무덤(왼쪽). 정유재란 때 조선에 왔다가 그대로 남은 중국인 장수 시문용의 무덤.
시문용은 1572년 중국 절강에서 태어나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에 파병된 무장(武將)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 군대는 철수했으나 전투하다 입은 어깨 부상으로 그는 경상도 성주에 남게 되는데, 이때 합천에 살던 정인홍(鄭仁弘)과 만난다. 정인홍은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오른 대북파의 영수다. 정인홍과 시문용이 사귀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사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난 조선 중기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은 풍수지리, 특히 중국의 풍수이론을 선호해 중국인 풍수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또 정인홍의 조상 역시 절강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인연으로 정인홍은 시문용을 고향 사람이라 하여 각별히 대했다.
“풍수와 사주를 좋아했던 정인홍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시문용에게 길흉을 점치게 한 뒤 그에 따라 행동했다”고 동시대인 신흠(申欽)이 적을 정도였다. 정인홍은 당시의 임금 광해군에게 시문용을 소개했다. 이에 광해군은 1617년 경상감사에게 시문용을 한양으로 올려보내도록 했다.
한양에 온 시문용은 경덕궁(경희궁)과 인경궁이라는 새로운 궁궐 조성에 깊게 관여하며 광해군의 몰락 때까지 ‘왕실풍수’로 활동했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에다 잇달아 궁궐을 지어 국력을 낭비하고 무리한 인력동원으로 백성의 원성을 자아냈다. 당시에는 그 원흉으로 시문용이 지목되기도 했다.
백성과 대신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광해군이 궁궐 조성을 시도했던 것은 전란으로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도성의 지기가 쇠했다고 믿어 처음에는 도읍지를 파주 교하(交河)로 옮기려 했다. 도읍지 이전으로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좌절되자, 그 대신 새로운 궁궐을 짓게 했다.
광해군은 새 터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이는 기존 궁궐의 지기가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광해군은 풍수설을 믿었으며, 시문용이 광해군의 신임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시문용의 후원자였던 정인홍은 처형된다. 왕조실록은 시문용도 다른 풍수들과 함께 처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시문용 후손들은 그의 사망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광해군의 실각과 함께 시문용은 경북 성주군 수륜면 ‘아래맏질’이란 마을로 내려와 자연과 술을 벗삼아 여생을 누리다가 1643년 사망해 마을 뒷산에 안장됐다. 그 자리는 시문용 자신이 생전에 직접 잡은 자리라고 한다.
조정에서는 처형했다고 한 그가 어떻게 20여년 동안 더 살 수 있었을까? 만일 이 내용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조정에서 다른 조선인 풍수들은 처형했지만, 시문용은 조선이 섬기는 상국(上國) 중국에서 온 무장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눈감아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손들은 시문용의 무덤 자리가 ‘바늘이 매달린 형상의 명당(현침혈·懸針穴)’이라고 한다. “이곳을 현침혈로 보는 이유는 바늘처럼 길고 가는 능선에 맺힌 혈을 빗대어 말한 것으로, 이름을 날릴 인물이 나올 수 있는 땅이라기보다는 후손들이 편안하게 보신(保身)하며 살 수 있는 땅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이국 조선 땅에 살면서 후손들이 크게 화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시문용 자신이 찾았던 것 같다”라는 최낙기씨(선문대 강사)의 평이 흥미롭다. 실제 이곳 마을은 지금도 오지로서 난세의 보신지지(保身之地)로 적절한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