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쓰 기술을 사용한 LG전자 제품(왼쪽)과 독자 기술임을 주장하는 삼성 제품.
“못 내놓는다.”(삼성 SDI)
삼성 SDI와 후지쓰가 자존심을 건 한판 기술 전쟁에 들어갔다. 후지쓰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lasma display panel·PDP) TV의 원천기술을 삼성 SDI가 로열티도 내지 않고 도용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고, 삼성 SDI 측은 후지쓰가 만천하에 공개된 기술을 두고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맞서고 있다.
두 기업이 이렇게 으르렁대는 이유는 PDP가 벌어들일 미래수익이 만만치 않기 때문. 게다가 상대국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기업 당사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다.
그런데 정작 이 PDP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PDP의 핵심인 플라스마는 우주를 이루는 물질의 기본 상태다. 게다가 플라스마는 형광등에서부터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각광받는 핵융합로에 이르기까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다재다능한 능력을 뽐내고 있다.
커다란 그릇에 얼음을 한가득 넣고 불을 때면, 얼음은 어느새 녹아 물이 된다. 이 물을 더 강한 불로 가열하면 펄펄 끓으면서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증발해버리는 게 자연 법칙이다. 아무리 단단한 금속이라도 열에너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액체가 되었다가 마침내는 기체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오로라·번개는 자연 플라스마
그런데 만약 이 기체들을 날아가지 못하게 붙잡은 채로 더 열을 가하면 어떤 상태가 될까? 이때 물질은 희한하게도 기체도 액체도 아닌, 요상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물질의 제4상태인 플라스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99%는 이 플라스마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극지방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오로라나, 여름철 소나기에 내리치는 번개 등이 우리가 자연에서 접할 수 있는 플라스마다.
플라스마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인 1928년, 미국의 물리학자 랭뮤어에 의해서다. 당시 랭뮤어는 방전관 안에서 아크방전을 일으키면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를 ‘플라스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플라스마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평상시에는 언제나 같이 어깨를 부대끼며 붙어 있는 전자와 양이온이 분리되어 따로 국밥처럼 노닌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전자와 양이온 전하의 숫자는 같아서 전기적으로는 중성을 띤다.
또한 미처 이온과 전자로 분리되지 못한 물질이 부지런히 안정된 상태를 찾아 움직이는데, 이때 자외선을 비롯한 빛 에너지와 진동이 나온다. 과학자들은 이 모든 특성을 놓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 활용해왔다.
플라스마 현상을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생활용품이 바로 형광등이다. 플라스마는 높은 온도뿐 아니라 기체의 밀도가 높은 경우 전기 방전에 의해서도 만들어지는데, 형광등은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형광등 안에는 적은 양의 수은과 아르곤 가스가 들어 있고, 양 끝단에 전극이 고정되어 있다. 전원을 켜면 이 전극에 전기가 흘러 아크가 발생하면서, 플라스마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플라스마의 기본 성질대로 자외선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이것이 형광등 겉에 발라져 있는 형광물질에 부딪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빛, 즉 가시광선으로 바뀐다.
사실 최첨단 기술로 알려진 PDP의 기본 원리도 이 형광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PDP를 해체하면, 유리판과 가스가 가득 차 있는 미세한 작은 방(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셀이 작은 형광등과 같은 원리로 빛과 색을 내면서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형광등 겉에 붉은색 물감을 칠하면 정육점의 붉은 조명이 되는 것처럼, PDP는 모래알보다 작은 형광등에 빨강 초록 파랑의 세 가지 색을 칠해서 커다란 판에 붙여놓았다고 생각하면 맞다. 이 작은 형광등들이 커졌다 꺼졌다 하면서 퍼즐처럼 커다란 영상을 만들어내는 원리다. 이렇게 셀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빛을 내니 기존 TV 브라운관이나 LCD(Liquid crystal display·액정디스플레이)와 달리 별도의 광원이 필요 없기 때문에 대형 화면 제작에 매우 유리하다. 현재 PDP 기술을 이용한 모니터는 80인치, 즉 화면의 대각선 길이가 2m가 넘는 것까지 만들고 있다.
플라스마가 톡톡히 기여하고 있는 분야 가운데 핵융합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핵융합은 수소 원자핵 4개가 결합해서 헬륨 원자핵으로 합성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에 미래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태양의 엄청난 에너지도 내부에서 끊임없이 수소핵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소핵융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 내부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플라스마라는 점이다. 즉 핵융합 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거대한 플라스마를 만들고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도록 조건을 갖춰야 한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플라스마를 유도하고 가둬놓기 위한 거대한 토카막을 짓는 데 골몰하고 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핵융합사업단이 만든 초전도 핵융합 토카막 K-STAR도 실은 플라스마를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그릇과 같은 개념이다.
이밖에도 플라스마는 용접이나 반도체의 에칭, 이온 주입, 재료의 표면처리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심지어 쓰레기를 태우는 기술에도 사용되고 있다.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주변에 우주가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