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는 ‘빈곤문화’를 설명하면서 빈민층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분노와 불신의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어쩔 수 없다는 좌절감과 박탈감 탓에 생겨나는 감정일 것이다.
이 빈곤문화가 어떤 경우에는 ‘변화의 문화’로 바뀌곤 한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분노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바꿔보려는 건설적인 에너지로 바뀌어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와 불신의 감정 대신 관용과 체계적인 사고방식이 들어서고, 자신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불공정한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게 된다.
‘브라질의 영웅’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 자서전의 키워드는 ‘빈곤과 변화’다. 기자 출신의 작가 데니지 파라나가 룰라와 그 가족을 인터뷰해 엮은 이 책은 위대한 영웅의 신화라기보다 자신을 한낱 ‘금속노동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한 남자의 인생고백으로 읽힌다.
“나는 아직도 정의로운 사회, 동등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연대가 끈끈한 사회의 건설을 꿈꿉니다. 그리고 나라의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꿈꿉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이런 말들로 브라질 노동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지만 어린 시절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평범한 아들일 뿐이었다. 브라질 북부 페르남부쿠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둘째 부인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다섯 살이 돼서야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일곱 살부터는 땅콩과 오렌지를 팔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룰라는 15살에 국가기술연수원에서 지원하는 기술 선반공 자격증 과정에 등록한 뒤 한 공장을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이때 그는 프레스에 한쪽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24살이 되던 1969년 그는 상파울로에 있는 금속 및 전기기구 공단 노동조합으로부터 집행부 제의를 받았다. 그의 형 프레이 쉬쿠가 자신에게 들어온 제의를 동생에게 넘긴 것이다. 룰라는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그의 긴 노조활동의 시작이었다.
현실의 모순을 파악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룰라는 차츰 활발하게 노조활동을 벌였고, 1975년 열린 노동조합 선거에서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이 무렵 브라질에서는 룰라와 다른 노조활동가들의 노력으로 신노동조합주의가 탄생했다. 즉 반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포퓰리즘적인 노동정책과 온정주의에 입각해 수년간 브라질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노동조합주의(syndicalism)가 아니라 임금인상, 고용안정 보장, 근로조건 개선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에 중심을 뒀다. 이념보다는 ‘세끼 밥’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룰라는 3년 뒤 노조위원장에 재선됐고 당시 법으로 금지돼 있던 대규모 총파업을 통해 전횡을 일삼은 군부독재에 맞섰다.
1980년에 세 번째 금속노조위원장에 당선된 그는 기록적인 41일 파업을 단행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감옥 안에 있는 동안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좌파였지만 공산주의와 연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가의 민주화를 꿈꾸던 기업가들에게서 ‘신뢰할 수 있는 조합주의자’로 인식됐다.
같은 해 2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정치권에 등장해야 한다는 의견에 인식을 같이한 룰라와 노조운동가, 지식인, 가톨릭계 인사들이 단합해 노동자당(PT)을 만들어 브라질 정치 무대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PT는 국가의 변화는 국민으로부터 비롯돼야 한다는 이념으로 기존의 봉건적인 정치 엘리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룰라는 정치적으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던 보수파들의 거친 풍랑에 휩싸였고, 개혁을 지향하는 진보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이로 인해 PT는 ‘떠돌이 고양이들의 단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다자주의에 대한 논의가 갈수록 증가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좌익 정당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브라질이나 오늘의 우리 사회나 마찬가지다.
4수(修)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룰라는 가장 먼저 국민 누구나 하루 세 끼 식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아 퇴치 프로그램인 ‘포미 제로(fome zero)’를 시행했다. 2001년 당시 빈곤의 기준치를 하루 1달러로 할 때 브라질에는 4606만명의 극빈자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을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였기 때문이다. 집권 뒤 1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마이너스 0.2%를 기록하는 등 큰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세계 각국은 브라질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으며, 국민 65%가 룰라의 개혁 정책에 긍정적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을 두고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신선한 충격이자 다가오는 미래에 희망을 예고하는 21세기 경사다”라고 말했듯, 그는 여전히 브라질의 희망이다.
데니지 파라나 엮음/ 조일아 외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308쪽/ 1만원
이 빈곤문화가 어떤 경우에는 ‘변화의 문화’로 바뀌곤 한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분노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바꿔보려는 건설적인 에너지로 바뀌어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와 불신의 감정 대신 관용과 체계적인 사고방식이 들어서고, 자신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불공정한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게 된다.
‘브라질의 영웅’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 자서전의 키워드는 ‘빈곤과 변화’다. 기자 출신의 작가 데니지 파라나가 룰라와 그 가족을 인터뷰해 엮은 이 책은 위대한 영웅의 신화라기보다 자신을 한낱 ‘금속노동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한 남자의 인생고백으로 읽힌다.
“나는 아직도 정의로운 사회, 동등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연대가 끈끈한 사회의 건설을 꿈꿉니다. 그리고 나라의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꿈꿉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이런 말들로 브라질 노동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지만 어린 시절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평범한 아들일 뿐이었다. 브라질 북부 페르남부쿠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둘째 부인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다섯 살이 돼서야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일곱 살부터는 땅콩과 오렌지를 팔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룰라는 15살에 국가기술연수원에서 지원하는 기술 선반공 자격증 과정에 등록한 뒤 한 공장을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이때 그는 프레스에 한쪽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24살이 되던 1969년 그는 상파울로에 있는 금속 및 전기기구 공단 노동조합으로부터 집행부 제의를 받았다. 그의 형 프레이 쉬쿠가 자신에게 들어온 제의를 동생에게 넘긴 것이다. 룰라는 마지못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그의 긴 노조활동의 시작이었다.
현실의 모순을 파악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룰라는 차츰 활발하게 노조활동을 벌였고, 1975년 열린 노동조합 선거에서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이 무렵 브라질에서는 룰라와 다른 노조활동가들의 노력으로 신노동조합주의가 탄생했다. 즉 반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포퓰리즘적인 노동정책과 온정주의에 입각해 수년간 브라질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노동조합주의(syndicalism)가 아니라 임금인상, 고용안정 보장, 근로조건 개선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에 중심을 뒀다. 이념보다는 ‘세끼 밥’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룰라는 3년 뒤 노조위원장에 재선됐고 당시 법으로 금지돼 있던 대규모 총파업을 통해 전횡을 일삼은 군부독재에 맞섰다.
1980년에 세 번째 금속노조위원장에 당선된 그는 기록적인 41일 파업을 단행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감옥 안에 있는 동안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좌파였지만 공산주의와 연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가의 민주화를 꿈꾸던 기업가들에게서 ‘신뢰할 수 있는 조합주의자’로 인식됐다.
같은 해 2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 정치권에 등장해야 한다는 의견에 인식을 같이한 룰라와 노조운동가, 지식인, 가톨릭계 인사들이 단합해 노동자당(PT)을 만들어 브라질 정치 무대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PT는 국가의 변화는 국민으로부터 비롯돼야 한다는 이념으로 기존의 봉건적인 정치 엘리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룰라는 정치적으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던 보수파들의 거친 풍랑에 휩싸였고, 개혁을 지향하는 진보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여줬다. 이로 인해 PT는 ‘떠돌이 고양이들의 단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다자주의에 대한 논의가 갈수록 증가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좌익 정당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폐쇄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브라질이나 오늘의 우리 사회나 마찬가지다.
4수(修)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룰라는 가장 먼저 국민 누구나 하루 세 끼 식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아 퇴치 프로그램인 ‘포미 제로(fome zero)’를 시행했다. 2001년 당시 빈곤의 기준치를 하루 1달러로 할 때 브라질에는 4606만명의 극빈자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을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였기 때문이다. 집권 뒤 1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마이너스 0.2%를 기록하는 등 큰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세계 각국은 브라질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으며, 국민 65%가 룰라의 개혁 정책에 긍정적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을 두고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신선한 충격이자 다가오는 미래에 희망을 예고하는 21세기 경사다”라고 말했듯, 그는 여전히 브라질의 희망이다.
데니지 파라나 엮음/ 조일아 외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308쪽/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