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의 ‘솔로몬의 심판.’ 암논과 압살롬의 쟁투로 인해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됐다.
수많은 아들 중 아히노암이 낳은 암논이 맏아들인 셈이다. 서열로 따지면 암논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암논은 왕위를 계승할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암논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아리따운 여자들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이복 여동생인 다말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말은 나중에 다윗에게 반역하는 압살롬의 여동생이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내 마아가의 소생으로 다윗의 셋째 아들인 셈인데 긴 머리에 흠 하나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잘생긴 압살롬에게 다윗의 마음이 끌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여동생 다말도 압살롬의 미모를 닮아 아리땁기 그지없었다. 이복오빠인 암논이 반해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으니 다말의 매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암논은 이복누이를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어 속만 태우며 밥도 잘 먹지 못하고 말라갔다.
그 무렵 다윗의 형 시므이의 아들인 요나답이 암논에게 다가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는지 넌지시 물었다. 암논이 자초지종을 말하자 요나답은 암논에게 다말과 동침할 수 있는 계책을 내놓았다.
병에 걸린 것처럼 한 뒤 병구완 오게끔 만들어
암논은 먼저 요나답의 계책대로 중병에 걸린 것처럼 꾸며 침상에 누워 시름시름 앓는 척했다. 맏아들 암논이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병문안을 왔다. 그러자 암논이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이 구워 만든 과자를 먹고 싶다며 엄살을 부렸다. 다윗은 암논이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줄 모르고 다말에게 사람을 보내 오빠의 부탁을 들어주라고 했다.
다말은 암논의 병구완을 위해 그의 집으로 가서 밀가루를 반죽해 과자를 구웠다. 암논은 침상에 누워 자신이 연모하는 다말이 과자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말을 보면 볼수록 안고 싶은 욕정이 끓어올랐다. 과자가 냄비 속에서 구워지면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다말의 체취인 양 과자 냄새는 암논의 욕정을 더욱 자극했다.
다말이 과자를 식탁 쟁반에 옮겨놓았다.
“오라버님이 먹고 싶어하신다는 과자 다 구웠어요.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서 한번 드셔보세요.”
그러자 암논이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일어날 힘조차 없구나. 네가 여기 침상으로 와서 과자를 집어서 내 입에 좀 넣어주려므나.”
다말은 별 의심 없이 과자를 손에 들고 암논의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다말이 손에 든 과자를 암논의 입에 넣어주려는 순간, 암논이 다말의 손을 잡아 끌며 애원하듯 말했다.
“누이야, 너를 안고 싶다. 너를 안고 싶어 미치겠다.”
“오라버님,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용납되지 않아요. 괴악한 일이라고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래도 암논은 막무가내로 다말을 침상으로 잡아끌려고 했다.
“오라버님, 정 그러시다면 아버님께 말해 저를 오라버님의 아내로 달라고 하세요.”
“아버님이 허락하실 것 같으냐.”
그러곤 암논은 다말을 강제로 침상에 뉘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다말은 반항했으나 암논의 몸이 자기 아랫도리를 파고 들어오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암논이 헐떡거릴수록 다말의 몸은 굳어지기만 했다. 다말의 눈에는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암논이 정욕을 다 채우고 나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나무둥치를 올라탄 기분이군. 그렇게도 내가 싫은 거야? 다른 여자들은 처음에는 싫어하다가도 내가 즐겁게 해주면 십중팔구 함께 달아오르는데, 넌 지독한 계집이야.”
이 상황은 필자가 약간 상상을 곁들여 극화해본 것이지만, 성경에서도 암논의 심리 변화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사무엘하 13:15)
이러한 극단적인 심리의 반전을 전문용어로는 ‘에난티오드로미(Enantiodromie)’ 현상이라고 한다. 이 말은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주로 인생 후반기에 겪게 되는 급격한 성격의 변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후반기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단기간 내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자주 목격된다. 특히 남녀의 애정관계에서 이 현상은 다반사로 나타난다.
열렬히 연모했던 만큼 증오하게 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앰비밸런스(ambivalence)’와는 사뭇 다르다. 그야말로 미움과 증오만 남은 상태다.
이 사건 발단으로 왕권 쟁투 … 암논 결국 비참한 최후
암논이 평상시의 다말을 보고 그 미모에 반해 애타게 연모했으나 이제 소원대로 다말을 안고 나니 이전에 연모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짐작한 대로 성적 결합에서 암논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만족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다말의 반항과 무반응으로 인해 모욕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단순히 한 여자를 가지고 싶다가 욕심을 채우고 났을 때 그 여자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심리 변화를 에난티오드로미라는 어려운 용어보다 ‘암논 콤플렉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낫겠다.
다말의 얼굴조차 보기 싫게 된 암논이 그녀에게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다말이 암논에게 항의했다.
“오라버님, 이럴 수는 없어요. 나를 쫓아보내는 것은 방금 나한테 행한 악보다 더 큰 악이에요.”
다말은 이왕 암논이 자기 몸을 차지했으니 암논의 여자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암논은 하인을 시켜 다말을 집 밖으로 끌어내고 빗장을 단단히 지르게 했다. 빗장이 굳게 걸린 문을 바라보는 다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다말은 출가하지 않은 공주, 다시 말해 처녀인 공주가 입는 채색옷을 곱게 차려입고 오빠의 병구완을 하러 왔는데 이제 그 채색옷을 입을 자격을 잃고 만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뿌린 뒤 통곡하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암논의 나이는 22살쯤 되고 다말의 나이는 15살쯤 될 것이다.
다말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치챈 친오빠 압살롬은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암논에게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렇지 않아도 왕위에 야심이 있었던 압살롬은 차기 왕 1순위 후보인 암논을 이번 일을 빌미로 제거해버리면 대권가도에 서광이 비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왕자의 정욕이 잘못 발산됨으로써 다윗 왕가에 피비린내 나는 쟁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암논과 압살롬은 죽고 어부지리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한 사람의 실수가 정치 상황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돌릴 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