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른 들릴라.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은 강력한 리더십을 잃어버렸다. 그때 그때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 모세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비하면 빈약한 편이었다. 이른바 리더십이 분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이라는 강력한 통치체제가 세워지기 전의 시기를 사사(士師)시대라고 한다. 사사는 원래 중국 주나라 때 백성들을 재판하여 형벌을 주던 관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용어를 ‘쉐페트’라고 하는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차용한 것이다. ‘쉐페트’는 주나라의 사사가 그러했듯이 백성들을 재판하고 지도하는 일을 했다. 헬라어나 라틴어 번역에서는 재판관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사사라는 말 대신 판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다. 사사시대를 대략 기원전 1390년에서 1050년까지로 잡는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사사기 맨 마지막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말하자면 사람들이 한 사람의 리더십 아래 모이지 않고 각기 자기 주관대로 살았다는 뜻이다. 사무엘까지 모두 15여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사들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활동상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사사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은 삼손이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큰 태양은 되지 못하고 작은 태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통치권에 들어가 안주해 있는 상황에서 삼손이 단독으로 블레셋에 대항해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첫 아내에게도 수수께끼 답 알려주었다가 큰 낭패
블레셋은 팔레스타인을 우리나라 식으로 부른 말인데, 사사시대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갈등과 쟁투가 시작된 셈이다.
민족의식을 일깨웠다는 면에서 삼손은 우리나라로 치면 안중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삼손은 안중근과 달리 자기 생활에 대해 절제가 부족한 흠이 있다. 무엇보다 블레셋 이방여자인 들릴라(델릴라)에 빠져 한때 분별력을 잃기도 했다.
처음에 삼손이 딤나 지역의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은 이유는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회로 들어가 그들 속에 섞여 살면서 복수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일부러 블레셋 여자를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손의 속마음을 모르는 그의 부모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족속의 딸과 결혼한다 하여 삼손을 나무랐다.
삼손의 최후.
블레셋 사람들은 7일이 지나도 그 수수께끼를 알아맞히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가 된 여자를 협박해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오도록 했다. 만약 알아오지 못하면 그 여자와 아비의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과 잠자리를 하면서 가련하게 우는 척하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미워하기만 하고 사랑하지는 않는군요.”
여자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 삼손이 아내를 달래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미워하다니요. 그랬다면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당신과 결혼했겠소?”
“나를 사랑한다면 왜 나에게 수수께끼 답을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세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할게요. 궁금해 죽겠단 말이에요.”
삼손은 아양까지 떠는 아내에게 그만 답을 말해주고 말았다. 아마도 삼손은 이때 술을 마셨을 것이고 자기가 블레셋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잠시 잊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자와 몸을 섞으면서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말이오, 당신과 결혼하려고 딤나로 오는 도중에 포도원에서 어린 사자새끼를 만났지 뭐요. 그 사자가 나한테 덤벼들기에 내가 그 입을 찢어 죽여버렸지요. 그리고 얼마 후에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길에 그 포도원을 다시 들러보니 사자의 시체에 벌떼가 모여 있고 꿀이 가득 고여 있더란 말이오. 그래서 그 꿀을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 집에 도착하여 가져온 꿀을 부모님에게 드렸단 말이오.”
“그러니까 동물을 잡아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것이 나왔군요.”
결국 그녀는 동족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 답을 알려주었고, 삼손은 그들에게 약속한 옷들을 주어야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이용해 답을 알아낸 사실을 눈치챈 삼손은 화가 나서 아내를 버려두고 혼자 부모의 집이 있는 소라 지역으로 가버렸다. 여자의 부모는 삼손의 그런 행동을 서운하게 생각하여 자기 딸을 다른 남자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후에 화가 풀린 삼손이 염소새끼를 안고 딤나로 와 아내를 찾았다. 그런데 아내의 침실로 들어서려는 삼손을 장인이 가로막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삼손을 달래기 위해 다른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고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블레셋 군대가 유다 지역에 진을 치고 쳐들어올 기세를 보이자 유다 사람들은 전쟁의 화근인 삼손을 결박해 블레셋 군대에 넘김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삼손은 자기를 묶은 밧줄을 삼줄 끊듯이 풀어버리고, 나귀의 턱뼈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쳐죽인다.
아내를 내놓으라고 장인과 옥신각신한 일이 도화선이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게 되었으니 원래 삼손이 마음먹었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 삼손은 딤나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범하게 된다. 소렉 골짜기로 내려갔을 때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자를 보고 반해버렸다. 딤나 여자와 결혼할 때는 블레셋을 친다는 전략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들릴라에게 반하여 욕정이 앞섰음이 틀림없다.
삼손이 들릴라에 빠져 지낸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통해 삼손이 가지고 있는 힘의 비결을 알아내려고 했다. 들릴라가 삼손을 애무하며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어떻게 해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물었다. 딤나에서 이미 실수한 경험이 있는 삼손은 이번에는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았다.
세 차례나 엉뚱한 답을 하여 들릴라를 골탕 먹이자 들릴라도 딤나 여자처럼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않으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합니까. 당신이 나를 세 번이나 희롱하고서도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는군요.”
아마도 들릴라는 자기를 안으려는 삼손을 거부하며 눈물까지 흘렸을 것이다. 또다시 마음이 약해진 삼손은 들릴라에게 힘의 비결이 머리카락에 있음을 알려주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삼손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침실에서 여자에게 잘못 속삭이다가 패가망신한 남자들이 많다. 평소에는 강하다가도 침실에서는 여자에게 약해져서 분별력을 잃고 마는 심리를 ‘삼손 콤플렉스(samson complex)’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