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7월, 김두황씨 등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대생들이 세운 ‘강제징집 학생 진혼비’가 철거됐다.
1983년 6월18일 군 복무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고 김두황씨(당시 24·고려대 경제학과 4학년 휴학 중)의 형 두원씨(47)는 최근 고려대의 명예졸업장 수여 제의를 거부하면서 “대학들은 군사정권에 부역해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과거를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두황씨는 1983년 3월18일, 학내시위 모의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강제징집된 후 머리에 4발의 총탄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군 당국은 김씨의 사인이 신병비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입대 전 그가 고려대 운동권의 리더였던 정황 등에 비추어볼 때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최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규명위) 조사 과정에서 고려대측이 김씨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의 강제징집에 적극 협조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되자 유족들은 “그의 죽음에 학교도 한 역할을 담당했다”며 명예졸업장 수여를 거부한 것이다.
학내 정보 보고·운동권 등급 매겨 관리도
지금까지 대학들이 강제징집에 협조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줄곧 제기돼왔지만,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문사규명위가 입수한 82년 10월5일자 서울대 관련 공문에는 ‘문교부 교육정책실 제2조정관실 최○○, 연구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협조 요청이 있었음. 사회대 사회학과 3학년 강○○, 공대 산업학과 3학년 유○○, 금일 중 군입대 조치가 되어야 하므로 협조하여 줄 것’이라고 적혀 있다. 경찰이 시위 가담 학생을 연행한 후 문교부와 학교측에 휴학 처리를 요구하면, 학교가 직권 휴학시켜 즉시 입대할 수 있게 도왔음을 보여주는 문서다.
김씨와 함께 연행돼 강제징집됐던 양창욱씨(43·당시 고려대 사회학과 4학년)도 당시 두 사람의 입영에 학교측이 적극 협조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성북경찰서에 연행된 후 일주일 내내 얻어맞으며 갖가지 조사를 받았다. 한참 지쳐 있는데, 웬 키 작은 남자가 경찰서로 찾아와 ‘군대만 가면 구속은 면할 수 있다’며 종이를 내밀었다. 그 상황에서 뭘 생각할 수 있었겠나. 형님이 나 대신 서류를 작성해 그에게 주었다.”
양씨는 도장을 찍자마자 형사기동대 차에 태워져 103 보충대로 보내졌다. 신체검사나 영장 발부도 없이, 그는 어느새 군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3남3녀 가운데 막내였던 김두황씨와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위). 80년 ‘서울의 봄’ 당시 친구들과 함께 교정을 걷고 있는 김씨(왼쪽에서 두 번째).
의문사규명위가 입수한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대학들은 강제징집에 협조했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과 유인물 배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문교부 교육정책실에 보고하고, 운동권 학생들을 등급을 매겨 관리하는 등 학생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84년 ‘고려대 제적학생 복교대책위원회’가 만든 ‘강제징집 실태보고서’에는 “학생처장 모 교수는 학생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하자고 한 후 그 대화를 녹음하여 학생들이 강제징집에 희생되는 증거물로 삼았다. 도대체 어떻게 교수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며, 학생들이 스승 앞에서 시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 어떻게 강제징집의 증거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부분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이 특정 대학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의문사규명위 이재범 조사관은 “79년 10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 모든 대학의 학칙에 ‘학업을 정상적으로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는 총장이 직접 휴학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의 ‘지도 휴학’ 조항이 신설됐다”며 “당시 정부가 모든 대학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80년 6월 문교부에 학원 통제를 주업무로 하는 ‘교육정책실’이 생기면서 대학의 자율성은 더 위축됐다. 사실상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강제징집에 협조하고 학생 동향을 정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상황이 엄혹해지자 대학들이 정부의 통제에 앞서 ‘알아서 기는’ 상황까지 빚어졌다는 점이다. 고려대 학생처가 85년 7월13일 작성한 ‘진혼비 철거 계획’은 이 같은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 해 4월 고려대생들이 군에서 의문사한 6명의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교내에 비석을 세우면서 불거진 학교와 학생 사이의 갈등은 7월23일 경찰이 진혼비를 강제철거하면서 일단락된다.
대학들 군대 의문사 사건 조사엔 비협조
그러나 이 조치가 있기 전부터 학교측은 ‘80년대 초 민주화 대열의 선봉에 서서 싸우다 군에 강제징집되어 죽음을 당한 6명 학우의 혼을 달래려 이 비를 세우다’라는 글과 함께 김두황씨 등 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 비석을 철거하기 위해 300명의 교직원을 동원해, 학생들과 충돌하는 등 무리수를 두었다.
최근 발견된 이 문서에는 학교측이 석 달에 걸쳐 비석을 철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사실이 상부기관 보고문서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 연세대 등 다른 대학의 자료에도 불온한 낙서를 한 학생을 적발해 징계하는 등 대학이 정부 지시가 있기 전부터 학생들을 통제하고 의사 표시를 가로막았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적지 않다.
김씨의 유족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이처럼 군사정권에 적극 협조했던 대학들이 지금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문사규명위는 김씨 의문사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2000년 12월19일, 고려대측에 김씨가 연행된 83년 3월경 고려대 출입 경찰과 보안사 담당자, 김씨가 성북경찰서에서 수사받을 당시 성북서에 출입하며 징집 휴학 처리를 담당한 교직원 등의 신원 등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지만, 학교측은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 의문사규명위는 그 후에도 수차례 자료를 더 요구하다 2003년 10월16일 직접 학생처 캐비닛을 열어 관련 자료를 입수했다.
5공 시절 대학이 강제징집 등 정권의 학원 통제에 적극 협조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
하지만 고려대측은 “불행한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 차원에서 따로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며 유족들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두황 추모사업회’ 홍기완씨는 88년 고려대에서 열린 진혼탑 복구대회에서 고려대 사학과 이상신 교수가 한 발언을 학교측에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설사 군에 강제징집된 젊은 대학생들이 자살했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교 당국에도 책임이 크다. 어린 학생들이 군에 끌려가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는 아랑곳 않고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한 시대가 저지른 범죄에 적극 가담한 공범자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지금 학교는 이 지적 앞에 당당할 수 있는가.”